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가
<향연>에서 플라톤은 디오티마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에로스(사랑)는 아름다운 것에 관한 사랑(에로스)’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말은 지당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대부분 수학적 비율(피타고라스)이나 어떤 완벽한 이상(이데아)을 아름다움의 한 본보기로 삼은 것은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 조각.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어디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명히 수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그와 그녀를 사랑한다. 수학적 비율이 완벽한 이상/이성을 감히 넘보지 못해 애초에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X(수학적으로 완벽한 어떤 아이돌이나 배우)보다 난 당신이 더 예쁘고 멋있어,라고. 이 말을 단지 아부나 거짓말로 환원하기에는 진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방에게 미안한 일이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콩깍지가 씌이다는 말처럼, 눈이 멀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사랑하는 사람은 현미경으로 보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섬세하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인 사이먼 블랙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정말 눈이 머는 것은 아니다. 다만 피부와 점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피하지방까지 꿰뚫어볼 정도로 상태를 실눈 뜨고 바라본다. 기묘한 것은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고 오히려 황홀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사랑하는 사람의 ‘배둘레햄’을 기근을 대비해 축적해 놓은 애교스러운 비상식량이라고 생각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기미와 주근깨를 밤하늘에 총총 걸린 별처럼 아름답게 느낀다는 의미이다.
검고 큰 눈, 긴 코, 작고 붉은 입술. 살짝 든 고개와 표정은 슬퍼 보이기도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말일까. 그녀는 누구일까. 이 그림은 그녀를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수학적인 완결성과 과학적인 엄밀성이 지배하는 곳에는 어떤 상상력이 끼어들 틈이 없다. 상상할 수 있는 그녀, 그런 당신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이제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이상적인 어떤 외부(수학적 비율, 이데아)에서 우리 내면으로 들어온 것 같지만, 한편 모든 것들의 상품화와 그것을 전파하는 매체를 통해 다시 어떤 외부가 강요하는 획일성으로 좁아지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획일성은 ‘섹시함’인데, 과학적으로 계량되고 측정되고 수술(시술) 된, 섹시함이라는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유령이 (특히 강남)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수학적으로 완벽하다한들, 그 완벽함에는 내가 끼어들 틈이 없다. 처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그와 그녀의 어떤 이상적인 모습 때문일 수도 있다. 가령 그와 그녀의 호감 가는 몸매, 좋은 직장과 어떤 능력, 유머감각과 카리스마 (여성인 경우 필살의 애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꼭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깊은 사랑은 어떤 갈라진 틈, 상처처럼 벌어진 어떤 틈을 통해서 생겨난다. 나의 상처에 그가 깃들고 그의 상처에 내가 깃들면서, 우리는 사랑한다고 느낀다.
당신의 상처를 사랑하는 내 사랑은 오류이고 나의 상처를 사랑하는 당신의 사랑도 오류다. 오류가 오류를 알아볼 때, 그때 상상력으로 우리의 진정한 사랑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