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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Jan 15. 2016

우리는 이별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애도와 우울


사랑이 있어야 이별이 가능하고 이별이 있어야 사랑이 가능하다. 사랑이 있어야 이별이 가능하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이별하자고 말할 리 없다. 사랑은 이별의 전제이다. 동시에 이별 또한 사랑의 전제다. 하지만 이때 이별은 제대로 된 이별을 의미한다. 제대로 된 이별은 다시 진정한 사랑을 가능케 한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논문, <애도(슬픔)와 우울>에서 이렇게 말했다.     


애도(슬픔)는 (...) 현실의 요구와 명령은 조금씩 조금씩, 많은 시간이 경과되고, 많은 에너지의 소비가 있고 난 뒤에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 슬픔의 작용이 완결된 뒤, 자아는 다시 자유롭게 되고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우울은 상실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 애도(슬픔)의 경우는 빈곤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이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는 바로 자아가 빈곤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죽었을 때, 애도 또는 우울에 빠진다. 프로이트에게 애도란 부재인 그 사람과 관련된 우리의 기억을 떠올리며 일정 기간 동안 슬퍼하고 숙고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장례식, 초혼 의식 같은 제도적 애도나 상복(喪服)이나 상장(喪章)같은 것들은 애도의 대표적인 상징화 방식이다. 이런 애도의 시간을 통해서 우린 죽음의 사태를 조금씩 인정하고,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말하자면 이제 세상에 없는 그와의 다양한 일들과 이미지들을 돌이켜 보고, 추스르며 마음 한편에 담아두고 동시에 정리하는 작업을 천천히 해나가는 일, 그것이 애도이다. 그런 애도의 과정이 있어야 그를 따라 죽지 않을 수 있고, 우리는 다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우울은 죽음의 사태를 슬퍼하지만 슬픔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울한 자는 상실한 사람에 대한 무의식적인 증오가 생긴다. 자신을 두고 세상을 먼저 떠난 그를 원망한다. 그리고 우울증은 상대방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분노는 자신에 대한 분노로 바뀐다. 그리고 자신을 비하한다. 프로이트의 절묘한 말처럼, 우울증에 빠진 자는 무엇을 상실했는지 늘 분명하지 않다. 물론 이 말은 누가 죽었는지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구를 상실했는지 안다하더라도, 그 사람에게서 정확히 ‘무엇을 상실했는지’ 모른다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그러니까, 상실한 사람과 그 사람에서 상실한 것을 구별해야 하는데, 그 구별을 못함으로써 진정한 애도(슬픔)를 방해하고 우울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별 역시 대상의 부재로 인해 생기는 감정이라는 면에서 죽은 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후, 애도의 시간을 가지는 사람은 그 이별이 고통스러운 일임을 인정하고 깊은 슬픔의 시간을 가진다. 아무도 만나지 않을 수도 있고, 소란스러운 거리에서 소리 내어 엉엉 울 수도 있다. 아니면 (외로움을 자처한) 여행을 갈 수도 있고, 길고 긴 길을 외로이 걸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추억, 시간, 사진, 물건을 하나씩 정리해 간다. 급하지 않게. 이렇게 추스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이별을 이별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슬프지만) 다시 생활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울은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별했지만 아직 이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를 떠난 그를 원망한다. 그리고 그 원망이 결국 그를 떠나보내게 한 내게로 향한다. 때론 애써 별일 아니라는 듯, 친구들과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이별을 사태를 농담으로 취급하고 양손 가득 쇼핑을 하며 외면도 해본다. 하지만, 특별한 일을 특별하지 않은 일처럼 꾸미는 일은 더 큰 공허함만 몰려오게 한다. 말하자면 이별을 외면한다. 이별이라는 사태를 이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충분히 슬퍼하거나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일어나지 말야 할 일이 일어났다듯이 현실을 외면하고 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울에 빠진 자는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 잘 모른다는 점이다. 물론 그와 헤어졌기 때문에 슬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지적처럼 ‘상실한 사람’과 ‘그 사람에게서 상실한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울한 자는 ‘그’와 이별해서 슬픈 것인지 그와 이별해서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슬퍼하는 것인지, ‘그’가 아닌 그와 했던 ‘내 사랑 자체’를 상실해서 슬픈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제 단지 내가 솔로라서 슬픈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뭉크, 울고 있는 누드, 1913~14>

이별해서 슬프면 그 슬픔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은 가장 타당한 이별의 방식이다. 충분한 슬픔의 기간을 가지고 그와의 시간과 추억을 성급히 외면하고 버리기보다,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그래서 더 깊이 슬퍼해보고 그리고 조금씩 정리해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힘들지만 이별하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충분히 그런 애도의 기간을 가졌을까. 친구들과 술 한잔으로, 친구들의 시답지 않은 위로 한마디로, 그리고 공허한 웃음으로 우리는 이 이별의 사태를 잠시 외면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성급히 소개팅을 받으며 손쉬운 만남으로 이별을 성급히 봉합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별을 위해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혼자 걸어 봤는가, 우리는 이별을 위해 심장이 터지도록 달려 봤는가, 우리는 이별을 위해 사람 많은 공원에서 울어 봤는가, 우리는 이별을 위해 길고 긴 편지를 써봤는가, 우리는 이별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이별을 위해 우리가 숙고하며 무엇인가를 했을 때, 우리는 이별을 이별로 받아들이고 그를 잊는다. 이제, 깊은 고통과 환멸을 통해 성숙해진 우리는 전보다 더 성숙한 사랑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사랑한다. 그래서 제대로 이별하는 일은 곧 제대로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별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니까.              


사랑이 실패한 것은 내가 타자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몰랐기 때문. 진정한 문제는 지금 타자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별은 이렇게 독이면서 약이다. 질 나쁜 연애소설은 연애에서 생긴 문제를 다른 연애(또 다른 타자, 반복되는 환상)로 봉합하지만, 괜찮은 연애 소설은 같은 문제를 이렇게 자기 발견(또 다른 나, 성숙한 환멸)의 형식으로 해결한다.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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