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탐사그룹 <셜록> 인턴 후기
말라 언니의 까만 눈동자를 기억한다. 상가를 까랑까랑 울리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언니를 처음 만난 날, 캄보디아에서 왔다는 말에 “앙코르와트!”하고 외치던 내 목소리가 겹친다. 언니는 언짢은 기분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캄보디아 사람이라고 앙코르와트 다 못 가.”
언니 덕분에 알았다, 한가하게 앙코르와트에 구경 갈 수 있는 캄보디아 사람은 얼마 없다는 사실을. 그날의 말실수가 내 마음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날 이후 언니의 삶이, 언니의 현재와 지나온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십 년 전 이야기다. 말라 언니는 우리 엄마가 운영하는 식당의 종업원이었다. 남편은 한량이었다. 낮엔 밖에서 술 마시고, 밤엔 집으로 노름꾼들을 불러들였다. 어쩌다 막노동을 뛰어 돈이 생기면 꼭 그 날 안에 탕진했다. 돈 있으면 빨리 써버려야지, 안 그럼 재수가 없다나 뭐라나.
말라 언니는 점점 야위었다. 울고불고 악써도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3년 만에 언니는 이혼했다. 이혼 사유는 충분했고 언니는 경기도 어딘가로 떠났다. 내가 아는 언니라면 똑똑하고 야무지게 잘살고 있을 거다. 말라 언니답게.
기획 <가장 작은 지구, 보은>은 말라 언니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이주여성’이라는 소재가 어렴풋이 떠오른 시점에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기억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은 대부분 엄마의 식당에서 일하던 언니들이었다. 말라 언니, 철옥 아줌마, 효니 언니에 대한 엄마의 증언이 내 기억에 겹쳤다.
누구의 기억 속에나
말라 언니가 한 명쯤은 있다
누구에게나 기억 속에 말라 언니 같은 존재가 있을 터다. 언니에게 내뱉은 섣부른 말 한마디에 대한 부끄러움과 회한이 나를 10년이 지나 결혼이주여성을 취재하는 데까지 이끌었다. 때론 남에게 받은 상처보다 내가 준 상처가 더 오래가게 마련이다.
한창 취재를 하면서, 말라 언니에게 어떻게든 연락해 볼까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만두었다. 대신 수많은 또 다른 말라 ‘언니들’을 만났다. 그들은 말라 언니와 얼마간 비슷했고 얼마간은 달랐다.
결혼이주여성을 인터뷰할 때 첫 질문은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됐나?”였다. 이는 곧 “왜 국제결혼을 선택했나?”인 동시에 “결혼을 결정하기까지 어떻게 살아왔나?”를 묻는다. 결혼이주여성의 한국행은 인생을 건 선택이기 때문이다.
결혼을 결심한 그 날을 떠올려달라고 요청하면, 그 전에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이야기, 더 어릴 적 초등학교 때부터 온갖 소일을 하며 가계에 보탬 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따라온다.
“결혼해서 한국 올 때 비행기 처음 타 봤어요. 그 전엔 여행은 꿈도 못 꿔요. 차로 한 시간 걸리는 바다도 가 본 기억이 없는데 뭐.”
보은으로 시집온 언니들은 대부분 국제결혼정보업체를 통해 결혼했다. 이 경우 대부분 고국에서도 농촌에 살았고, 가난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기 어려웠고, 여행은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 앙코르와트건, 할롱 베이건, 결혼 후 시댁 식구들이랑 가족 여행으로 처음 가 봤다고 멋쩍게 웃으며 말하기 일쑤였다.
처음엔 기막히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남아시아 곳곳을 며칠 휴가 내 쉽게 다녀오는데, 정작 그 나라 사람들은 평생 가 볼 일이 없다니.
하지만 결혼이주여성들을 만나면서 내 시선에 지나친 연민이 들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를 일깨운 것 또한 결혼이주여성이었다.
“한국 사람도 시골 살면 평생 왕 살았던 데(궁전) 못 가 보고 죽잖아요. 금강산, 백두산도 가고 싶다, 가고 싶다 하지 못 가는 사람이 훨씬 많잖아. 그거랑 똑같아.”
말라 언니에게
연락하지 않은 이유
개인의 삶을 사회로부터 떼어서 볼 수는 없다. 언니들 한 명 한 명을 만나면서 당사자 자신만이 아닌 결혼이주여성 전체의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법이 문제다”, “우리가 지금 이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며 강하게 무언가를 피력하는 언니들은 (아쉽게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입을 모아 말하는 게 있다, “다섯이 시집오면 셋은 떠난다”고.
남아 있는 사람들만 만나는
딜레마
내가 떠난 고향 보은을 지키는 언니들을 찾아간다는 기획에 따라 나는 남아 있는 사람들만 만나는 딜레마를 등에 이게 됐다. 다섯 명 중 떠난 셋은 보통 연락이 끊어진다. 이혼이든 가출이든 외국에서 시집온 여성이 남편과 헤어진 후 보은에서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쉬운 마음이 자꾸만 솟았다. 남아 있는 둘은, 짐작건대 뉴스가 적은 집단일 터였다.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떠난 이들에게 더 많은 이슈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남은 사람들에게 왜 사연이 없겠느냐마는, 앞으로도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까닭에 후련히 털어놓을 수만은 없을 거라고도 여겼다.
자꾸만 ‘더 센 이야기’를 찾는 나를 발견하고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의 네 번째 인터뷰이는 나와 만난 지 10분도 안 돼 눈물을 쏟았다. 그 언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눈물을 보이지 않은 취재원이 있었나 싶다.
말라 언니를 어떻게든 수소문해보려다 그만둔 까닭이 여기 있다. 언니가 보은에서 사는 동안 아팠던 기억을 괜히 들쑤시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남은 사람들의 삶에서 뉴스를 찾는 게 내 몫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석 달간 필리핀, 베트남, 일본, 태국, 캄보디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중국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을 서른 남짓 만났다. 며칠에 걸쳐 짧게 만나기도 했고, 하루를 통으로 따라다니기도 했다.
사건이 있는 곳에 찾아가는 게 아닌, 한 사람의 삶에서 이슈를 발견해 가는 기획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갈수록, 할수록 어려워졌다.
나도 처음 본 고향 모습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나는 저널리즘을 강의실에서만 배웠다.
대학 학보사나 언론사 인턴 경험 한 줄 없이 어느 날 ‘인턴 기자’라는 직함이 생겼다. 취재 협조 요청, 인터뷰, 팩트 체크 등이 전부 생전 처음 하는 일이었다. 무작정 고향에 내려가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취재한다며 돌아다니던 걸 돌아보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맨땅에 이마가 닿기 전에 공을 패스해 준 사람은 바로 언니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언니들은 나의 동료들이었다. 기자라는 이유로 (또, 보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 언니들. 덕분에 쫄지 않고 여기저기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스토리펀딩 <가장 작은 지구, 보은> 3화의 주인공 리티미(29)는 보은의 한 김치공장에서 일한다. 처음엔 공장 전경이나 작업복 입은 언니 모습 정도만 찍을 생각이었다. 나는 리티미 언니 손에 이끌려 점점 높은 사람에게 소개되더니 어느새 공장 투어를 하고 있었다. 일본 수출용 김치를 담그는 이모님이 맛 한번 보라며 내 입 속으로 연거푸 김치를 넣어주셨다.
기사에서 소개했지만 나는 밥도 많이 얻어먹고 다녔다. 커피숍에서 약속을 잡을라치면 “그냥 집으로 오라”는
언니들이 많았다. 점심때 맞춰 오라며 꼭 밥을 차려주었다. (뒤늦게 김영란법이 걱정되지만, 사준 게 아니라 차려준 것임을 강조한다.)
해야 할 인터뷰는 제대로 못 하고 맨 가지만 딴 적도 있다. 한국에 온 지 18년 된, 태국 출신 결혼이주여성을 소개받았을 때였다. 8월 중순이었고, 농사를 짓는 펜스리(57)는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시간을 따로 내기는 어렵고, 일하는 데 와서 물어보면 대답해주겠다길래 부리나케 달려갔다.
인터뷰 첫날엔 말린 고추를 선별해 포장하는 일이 한창이었다. 다음날엔 아침부터 보은 장에 나가 밭에서 가져온 채소를 팔았고, 오후엔 가지밭에 가서 밤늦도록 가지를 땄다. 일하는 틈에 인터뷰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쳤다’는 직감이 강하게 왔지만, 이왕 온 거 일이라도 거들어주고 돌아왔다.
누가 이방인인가
서울로 대학을 온 이후 고향엔 길어야 방학 때 일이 주 다녀오곤 했다. 졸업 후 아주 오랜만에 고향에서 3개월 넘게 머물렀다.
언니들이 보은에서 산 시간은 내가 떠나 있던 시간보다 이제 더 길다. 언니들을 만나며, 이젠 내가 이방인이 됐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 느낌은 지우려고 한다. 더 한국인이거나 덜 한국인인 게 없듯이, 터줏대감과 이방인도 나누지 않기로 한다. 다만 현재의 보은을 지키는 건 언니들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