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시작되는 순간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순간은 무엇일까. 엄마는 그 답을 ‘신뢰’에서 찾곤 했단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조금 내어주는 순간, 관계는 시작되고, 서로의 삶에 닿기 시작하지.
엄마도 살아오면서 수많은 상처를 겪었잖아. 사람을 믿는다는 건 때로는 무섭고도 큰 용기가 필요하더라.
배신당한 적도 있었고, 가장 가까운 이에게 깊게 실망한 적도 있었지. 그럴 땐 믿음이 무너지고, 마음은 얼어붙은 동굴처럼 차가워지는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어.
믿음으로 오는 배신은 시련이 컸어. 살면서 때론 상대에게 배신을 나도 모르게 준 적도 있겠지만,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는 깊게 페인 흉터가 남기게 되더라.
마음의 문이 닫히면, 사람에 대한 불신이 서리처럼 내려앉게 되었어.
젊은 시절 직장 생활을 할 때, 엄마는 돈을 다루는 부서에서 일했어. 사소한 흔들림만 있어도 신뢰는 무너지고, 하루아침에 범죄자로 몰릴 수 있는 자리었어. 그래서 늘 약속을 지키고 정직하게 일하며 나 자신을 증명해야 했어.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결국 그들도 엄마를 인정해 줬고 믿어줬어. 신뢰가 쌓이자, 폭넓은 업무를 배울 기회를 얻었던 거야.
그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해 조금은 알 거 같았어. 사랑이든, 우정이든, 일터에서든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믿음은 자라지 못했어. 내가 먼저 신뢰를 내밀 때, 상대도 그 마음을 받아들여 믿음으로 화답했지.
하지만 한동안은 마음을 담아두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도 있었어. 신뢰를 내밀수록 더 크게 무너지는 경험이 반복되더라.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고 여겼지. 그때 사람들은 엄마를 두고 ‘얼음 공주’라고 불렀어.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거든.
얼음 속에서는 어떤 관계도 피어나지 않겠구나, 어느 날 문득 떠올랐어.
내가 먼저 내 안의 겨울을 녹여야만, 작은 신뢰의 씨앗이 흙을 뚫고 싹을 틔운다는 것을, 창가에 놓인 화분을 보고 알았던 거야.
잔뜩 구긴 표정에서는 수많은 오해가 엄마 주위에 따라다녔어. 오히려 엄마를 오해해 두게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관계에서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어. 그건 부모가 되니 아이 눈을 통해 알아지더라.
그때부터 표정은 포근한 미소가 언제나 머물고 있었어. 주위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로 부드러워졌다고 했지. 엄마 스스로 변하는 모습에 내가 먼저 반응하고, 내가 나에게 주었던 신뢰가 쌓여, 굳게 잠근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거 같아.
여니야, 혹시 너도 살아가면서 사람을 믿는 일이 두렵게 느꺄지고 있니.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나를 믿으면 주위 보는 시야가 점점 넓어져 사람 보는 눈이 생길 거야.
그렇다고 너에게 잘해준다고 무조건 그 사람을 믿으면 안 되는 거야. 맹목적인 거는 아주 위험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꼭 거치도록 해. 내가 나에게 지키고 있던 믿음을 타인이 먼저 알아본다면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믿음은 결코 거창한 게 아니야. 내가 나에게 약속을 지키는 일, 상대에게 작은 약속을 지키는 일,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일, 서로의 상처를 나눌 수 있는 배려. 그 작은 순간들이 모여 신뢰라는 토양이 되고, 그 위에 믿음이 자라 숲이 되는 거야.
때로는 배신으로 마음이 다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란다. 결국 중요한 건 네가 너 자신을 먼저 믿고 신뢰하는 거야. 사람 자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순간, 진짜 관계는 부드러워져.
신뢰는 믿음의 뿌리야. 뿌리가 깊고 단단할수록, 누군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있어. 네 마음속 열쇠를 찾아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관계는 분명 오래도록 지켜나갈 거야.
엄마는 언제나 네 곁에서, 네가 용기를 내는 순간을 지켜보며 응원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