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인생 가을 편 11월호 - 계절이 내게 남긴 깨달음
짙어가는 계절 끝 무렵, 자연은 더 짙어지고 있다. 짙어진 계절 사이 나는 살아내고 있고, 자연과 시간은 거짓을 보여주지 않는, 늘 곁에 머무는 선물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 새로운 눈이 곁으로 왔다. 그건 내가 살아온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연이 조용히 다가와 속삭여주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 친구는 말했다. 자신은 나처럼 노화가 일찍 오지 않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자연이라는 큰 질서 앞에서 인간은 그저 순리를 받아들이는 존재일 뿐이다. 친구는 그 사실을 보지 못한 채 눈앞의 모습만으로 나와 자신을 비교했다.
친구가 한 말은 스스로 성장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내 마음에 스쳤다.
나에게 찾아온 노화는 단지 자연의 이치만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의 궁궐이자 내가 한 걸음 더 성장했다는 증거였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냈고, 어떤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끝내 버텨냈기에 찾아온 변화였다.
투병 당시 병원에서 진단받고 황망함이 몰려와 부끄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변화의 값어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살아냈음’이라는 사실로 남았다.
내 앞에 펼쳐진 이 작은 변화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결이자, 나만의 세계였다.
2019년 여름, 그해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돋보기라는 선물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주황빛 스탠드 아래에서 책장을 넘기던 무수한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세상을 탓하며 숨만 쉬듯 살아가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제 길을 찾지 못해 몸이 먼저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를 위해 공부하고, 나를 위로하고, 나를 다시 채워주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나는 깊어지고 있다.
나는 이제 돋보기를 숨기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던 가방 속에는 안경이 자리한다. 자연이 흐르는 결을 인간인 내가 거스를 수도, 되돌릴 수도 없기에 나는 자연을 받아들인다.
‘아직 젊은데, 벌써 돋보기냐’고 말하던 사람의 시선이 있을 때도, 오히려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을 자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만으로도 그들은 내가 허투루 살지 않았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건 자신을 이기고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만 비치는 빛이리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위해 고군분투한 덕분에 두 눈을 더 얻게 되었고, 그 눈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도왔다.
노화를 숫자로 판단하는 이들이 많다. 늙음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표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를 먹고, 살아낸 시간이 몸 곳곳에 흔적으로 새겨진다. 잘 살아냈든, 그렇지 않았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흔히들 말한다. 40대 이후 얼굴은 스스로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고.
보이는 흔적이든, 보이지 않는 변화든, 모르는 척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다음이 열린다.
책상 한가운데에 놓인 돋보기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증표다. 손가락 사이에 붙어 다니는 이 작은 안경은 이제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먼 곳의 가을 풍경을 두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이거면 되는 거다, 그래, 충분하다.
습관이 잘못되었다고 후회하거나 되돌아보며 미련이 붙잡았다면, 나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계절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듯 인정하고 받아들였기에, 지금의 나를 아늑하고 포근하게 안아줄 수 있었다.
나는 지금이 가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