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인생 가을 편 11월호 - 시련 속 쉼표
어느 가을, 어린 딸과 함께 걷던 낯선 골목길 위에 핀 민들레를 우연히 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민들레를 보는 순간 더욱 반짝이는 딸을 보며, 나는 조심스레 민들레를 꺾었다.
부드럽고 여린 작은 손 위에 민들레를 올려준다. 앙증맞은 입으로 후하고 불면, 솜털 씨앗들은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해 가을은 내게 아픔과 함께 물든 계절이었다. 아픔 속에서도 꽃은 피었다. 환하게 웃는 딸의 얼굴과 따스하게 불어오는 온기의 노을만으로 아픔을 잠시 뒤로 밀어낼 힘이 충분했다. 내게 가을은 그렇게 시름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길가 여기저기 피어 있는 민들레씨가 내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해 가을의 아픔은 바람과 함께 와, 나에게 속삭인다. 이제 괜찮냐고 묻는다. 발걸음을 멈춘 채, 나는 나에게 묻는다. 다 괜찮아졌냐고. 괜찮아진 나는 포근한 미소를 짓는다.
5년 전, 찬란하지만 그만큼 아팠던 가을. 겨울 문턱에서 만난 노란 민들레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련으로 하루가 힘겨웠던 그날, 다섯 살 딸과 함께 민들레를 불며 잠시 쉼을 선택했다.
딸의 웃음이 환하게 피어오를 때, 나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미래가 너와 나를 기다린다고 엄마만 믿고 걱정하지 말라고 딸의 웃음에 화답하듯 그렇게 웃는다.
민들레 솜털도 내게 말을 건넸다. 내가 딸에게 속삭이듯 말한 그대로, 쉬어도 된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누구도 해주지 않던 그 위로를 민들레가 대신해 준다.
짧은 팔과 다리로 씨앗을 잡으려 뛰어다니는 딸의 모습 뒤로, 노란 노을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가는 서해 쪽 어느 작은 동네 풍경이 얼어버린 내 가슴을 뭉글거리게 데워주었다.
노을빛과 눈부신 오후 햇살로 눈을 뜰 수 없어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아이 이마 위로 가져간다. 그리고 속삭인다. ‘저 노을은 우리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신호란다.’
딸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해맑게 웃음으로 답한다. 엄마가 어디를 가든, 함께 할 거라고. 엄마만 믿고 갈 거라고.
해가 기울어진 낯선 동네 어귀 어디쯤 모녀를 반길 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유모차에서 곤히 잠든 딸을 바라보며 엄마인 나는 다짐한다. 포근하고 아늑한 유모차처럼 나도 그녀의 든든하고 포근한 지지자가 되어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브레이크 없는 유모차처럼,
삶의 길이 무겁지만, 새근새근 잠든 딸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딸을 위해 유모차 보폭을 맞추어 나도 걸어간다.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면서.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민들레 씨앗이 알려준 쉼의 의미는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지금도 가을이 오면, 그날의 민들레와 딸의 웃음이 피어오른다. 나에게는 위안이자 달콤한 휴식이었나 보다.
그 기억 덕분에 시련이 오더라도 조금은 덜 무겁게 느껴진다. 나에게 숨결을 안겨준 가을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찬란한 빛을 내고 살아가게 한다. 그래서 난 지금도 가을이 그립고 그립다. 아팠던 가을을 말이다.
계절은 늘 나에게 치유이자 희망이다. 오고 가는 계절처럼, 상처와 행복이 공존하는 삶 속에서 나는 오늘도 그렇게 살아낸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리고 나는 안다. 삶이 아무리 고단해도, 민들레와 딸의 웃음이 위로라는 걸, 작지만 확실한 위로가 언제나 내 곁에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