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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Feb 15. 2019

기다려주면 좋겠다

우리는 참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타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초보가 경력자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 아픈 사람이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폭력과 미움, 질투는 충분히 기다리지 않고,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 김종원 [아이를 위한 하루 한 줄 인문학]


네가 훗날 “엄마가 나를 어떻게 키웠나”를 되돌아볼 순간이 있을까. 엄마 생각에,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네가 분명 찡그릴 만한 일이 몇 가지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엄마가 미리 반성하고 먼저 잘못을 말하는 것이니, 화가 나는 순간이었다 하더라도 그냥 넘어가 줘야만 한다. 약속할 수 있겠지?


하나는 피아노다. 엄마는 피아노 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처음 피아노를 접하기 시작했던 초등학교 1학년 즈음부터 클래식 음악도 많이 들었다. 6학년 때인가? 이불속에 들어가서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들으며 ‘오빠’들의 이야기로 킥킥대던 그런 시기만 빼고 말이다. 피아노를 전공한 것도 아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심지어 지금도 가끔씩 두드리는 것이 피아노인 만큼 엄마에게는 나름 비중 있는 취미 생활이기도 하지.


너에게도 엄마가 느끼는 기쁨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엄마가 할 수 있으니, 나를 닮은 너라면 당연히 나보다 빨리 그리고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음. 엄마의 이러한 확신이 지금은 이해가 힘들 수도 있겠지만, 부모들은 다 그렇단다.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조금만 건드려 주면 재능을 마구 뽐낼 것 같고 뭐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지금은 웃을지 몰라도, 너도 나중에 부모가 된다면 엄마 같은 시기를 분명히 겪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니 그만 웃으렴.


엄마는 너에게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들려주려고 했다. 일부러 또래들의 피아노 연주를 보여주기도 했지. 아직 악보를 볼 줄 모르니, 건반마다 각각 다른 스티커를 붙여놓고 종이에는 건반에 맞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따라 쳐보라고 유도해 보려고 말이다. 예를 들어 도=소방차, 솔=경찰차, 라=버스 라고 한다면, 종이에는 소방자 소방차 경찰차 경찰차 버스 버스 경찰차 그림 이런 식이었지. 억지로 강요하면 흥미를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관심을 끌어 보고자 했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너의 첫 번째 손가락과 다섯 번째 손가락은 도부터 솔까지 뻗어보기에는, 아직 너무 작았다. 그리고 너는 피아노 뚜껑을 열기보다는, 피아노 위의 장난감들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답답했다. 우리 아이는 음악에 소질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네가 겨우 5살이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도 참 부끄럽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너는 그림 그리는 것을 참 좋아했다. 스케치북 한 권은 1~2일 이면 다 썼다. 그림 그리는 동안에는 말 시키는 것도 싫어했고, 그림 그린 것을 가위로 오려서 갖고 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엄마는 생각도 못한 부분을 굉장히 자세하게 잘 묘사했다. 엄마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또 하나는 잠이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키 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먹는 것과 잘 자는 것이었다. 오히려, 잘 자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먹어도 제대로 잘 수 없다면 그것도 키 크는 것의 방해물이었거든. 


유독 밤이 되면 더 초롱초롱해져서 놀고 싶어 하는 너를, 참 많이도 억지로 재우려고 했다. 가끔은 그림을 더 그리고 싶은데 색연필을 정리해야 하는 너의 표정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키 크는 것도 중요하니 이 것이 맞는 방법인 것 같았다. 자야 하는데 안 자면, 엄마는 가끔 화가 나기도 했다. 잠들기 전 혼났던 너는 어떤 꿈을 꾸면서 잠들었을까.


그런데, 네가 마냥 밤에 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었다. 놀이터에서 2시간 넘게 뛰어놀며 에너지를 다 털어버린 날은 알아서 먼저 잠들었다. 그리고 잠드는 시간은 주기가 있었지. 일찍 잠드는 시기가 있었고, 늦게 잠드는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늦게 잠든 날에는 더 잘 수 있도록, 아침에도 엄마는 까치발을 들고 거실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단다.


왜 그렇게 너를 괴롭혔나 모르겠다. 


네가 음악에 소질이 있으면, 네가 알아서 음악적 행동을 보였겠지. 재능은 늦게 발견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언젠간 졸려서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을 텐데, 더 놀지 못한 너의 아쉬움이 일찍 잠들지 못한 것보다 오히려 더 해가 되었을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널 제대로 기다려 주지 못했던 것은 엄마 잘못이다. 조급한 마음이 들더라도, 이제는 마음의 중심을 잡고자 엄마도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다.


그런데, 너는 엄마와는 달랐으면 좋겠다. 엄마가 이렇게 조급한 행동의 단점을 알려준 만큼,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기다려 줄 줄도 그리고 너 스스로를 기다려줄 줄도 알았으면 좋겠다. 옆에서 닦달하고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보채더라도, 너가 널 기다려주면 결국 너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 만약 너 조차도 너를 기다리지 못한다면, 누군가의 성화에 못 이겨 상대방이 원하는 결과물을 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너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 결과물이 너 역시 원하던 것이라면 기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돌이킬 수 없는 아까운 시간만 낭비한 경우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조금 늦어서 그렇게 손해 보는 일도 드물단다. 잘할 거였으면, 늦게 시작해도 잘할 수 있단다. 그리고, 가끔은. 엄마도 기다려주면 좋겠다.



Photo by Gabriel Jimene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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