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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Nov 07. 2018

대부분의 시간은 일상에 있단다

“인생의 99퍼센트는 일상의 연속이잖아요. 예를 들어 비일상을 즐기는 여행에 돈을 들이기보다, 우선 하루하루 쾌적한 삶을 살고 싶어요. 볕이 잘 들고, 지면과 가깝고, 부엌이나 욕실처럼 물을 쓰는 공간이 청결한 곳에서요. 조립형 욕실에 인덕션 조리도구가 딸린 흔한 셋방은 싫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우선순위에 정답은 없고, 사는 방식 또한 0점도 100점도 없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이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 수 있는지를 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 오다이라 가즈에 [도쿄의 부엌]


결혼하고 몇 번째 생일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선물을 갖고 싶은지 묻는 너의 아빠에게, 엄마는 벽 한쪽에 붙여놓을 수 있는 커다란 세계 지도를 사달라고 했다. 어디선가 읽어보았는데, 벽에 세계 지도를 붙여 두고 직접 가본 곳에는 작은 깃발을 꽂아둔다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멋있었거든. 지도에 매달린 깃발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마치 세계를 정복한 기분이 들기도 할 테지. 그런데 막상 지도를 받고 나서는,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우선, 아빠는 정말 세계 지도 ‘종이’만 선물로 줬지. 돌돌 말아서. 서로 주고받는 생일 선물치곤 괜히 손해를 본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큰 종이를 벽지에 어떻게 붙여야 할지도 고민이었으며, 테이프로 붙이다간 지도 가장자리가 멀쩡하게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고민 끝에, 밤에도 문을 여는 복사/제본 업체를 찾아가 무광으로 코팅을 했다. 종이 값보다 코팅 값이 더 나왔다. 그제야 벽에 붙일 수 있었다.


심심한 지도가 아닌, 나름 알록달록 색채감이 있는 세계 지도는 멋졌다. 하지만, 지도 크기에 비해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지역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첫 여권을 만들고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던 스무 살 이후로는, 깃발은 동남아에만 몰려있었거든. 아. 미국도 캐나다도 호주도 아프리카도 북유럽도 가보고 싶다. 언제 가볼 수 있을까.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왜 나는 아무 때나 떠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걸까. 


한쪽 벽의 인테리어 소품으로는 손색없는 아이템이었지만, 슬슬 쳐다보기가 싫어졌다. 떠나야 하는데 떠나지 못하는 현실에 자꾸 짜증만 났으니까. 여행을 꿈꿀수록 현실은 초라해졌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상상 속 여행의 에피소드들은 점점 살을 붙여가며 장황해지는데, 정신을 차리고 둘러본 지금의 상황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다. 지도를 보면 여행을 가야 한다는 강박감만 커지고, 푸념을 위한 비교의 대상만 하나 추가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쨌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여행이야 마음대로 변경도 할 수 있고 리셋도 할 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는 내가 온전히 진지하게 감당해 나가야 할 실전이다. 그리고 여행을 떠날지라도 결국 다시 돌아올 곳은 바로 지금, 여기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비일상을 꿈꾸느라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 아닐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지금의 일상에 더 많은 애정을 주고 싶다.


우리는 여행을 위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여행은 이따금 일상이 주는 선물이다. 여행은 선물이라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일상을 하찮게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금 돌돌 말린 세계 지도는 당분간 창고 신세지만, 네가 학교에 갈 즈음에는 다시 꺼내려고 한다. 엄마는 깃발 꽂기라는 목표를 갖고 대했기에 지도가 독으로 다가왔지만, 너에게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 지를 알려주는 약으로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거든. 혹여, 엄마가 세계 지도를 들이밀며 너에게 영어 공부 더 열심히 해야지, 너의 경쟁자들은 세계 곳곳에 있다는 등의 욕심을 부린다면,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기를 바란다. 


함께 지도를 보면서 선물을 꿈꾸자. 일상을 소중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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