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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시월 Mar 03. 2019

인간이라는 증명

영화 가버나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8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가버나움> 평은 익히 들었다. 그렇지만  쳐지는 영화보다는 기운을 북돋아주는 에너지 가득한 영화를 보고 싶었던 때여서 다른 작품을 골랐다.

그러다 일정 문제로 보려던 영화를 취소하고 시간이 맞던 <가버나움>을 보게 되었다.

내 우려가 우습게도 영화는 생동감과 분노의 에너지로 충만해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 자인이 어떤 행동을 할 지 마음 졸이며 따라갔다.



영화는 자인이 경찰에 붙잡혀 의사에게 치아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난 빈민 소년 자인은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고 출생일자를 기억도 못해서 신분증은 물론 정확한 나이도 모른다.




길고양이나 야생동물을 동물병원에 데려가면 치아로 나이를 추정하는 것처럼 자인도 의사에게 치아를 보여주고 12살일 것이라는 추정을 듣는다. 불법체류증을 판매하고 아기를 거래하는 아스프로의 말처럼, 자인에게는 '인간이라는 증명'이 없다.

자인은 어리지만 순진하지 않고, 녹록지 않지만 순수하다. 죽음과 삶이 이 단단해 보이는 소년의 눈빛에 꽉 박혀있다.




법정에 선 12살 자인은 이렇게 외친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합니다."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자인이 왜 부모를 고소하게 되었는지를 찬찬히 보여준다.

레바논 베이루트의 낡은 건물, 자인의 가족들은 그곳 방 하나에서 생활한다.

자인과 형제자매들은 양육이라는 것을 전혀 받지 못하고 성장하고 있다. 아이들은 서로를 키우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교육을 받지 못하고 고된 일을 한다.





자인은 가장 각별한 여동생 사하르가 월경을 시작하자 그 사실을 부모에게 감추려고 최선을 다한다.

자인은 사하르에게 팬티 사이에 천을 끼우라고 알려주고 챙겨준다. 사하르는 시범을 보이는 자인을 보며 웃는다.




사하르는 월경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자인도 월경이 뭔지는 모르지만 이웃집 여자아이가 월경을 시작하고 나이 든 남자에게 팔려갔다는 것은 안다. 자인의 세계에서 월경은 여자 어른에게 얘기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비밀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가 나이  남자에게 사하르를 신부로 팔아넘길 것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잡화점 주인 아사드가 사하르에게 먹을거리를 챙겨주며 친절을 베푸는 게 영 불안한 자인이다.  

자인은 잡화점에서 생리대를 훔쳐서 사하르에게 가져다주고, 생리대를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완벽한 비밀을 꿈꾼다.





사하르의 월경에 대한 이 시퀀스는 한국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제 3자의 눈으로 보던 이 영화에 훅 빨려 들게 된 순간이었다.

생리대가 비싸다는 한탄은 일상적으로 듣고 느끼는 일이었다. 그러나 저소득층 소녀들이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서 월경을 하면 학교를 가지 않거나, 신발 깔창을 생리대로 쓴다는 기사를 2018년 한국 뉴스에서 봤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이건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할 문제다.




여성 캐릭터의 고난을 해결해주는 방식으로 남성 캐릭터의 매력을 보여주는 영화가 많다.  

 영화는 그처럼 자인의 매력을 사하르의 고난을 해결해주려는 과정을 통해 보여주지만, 뻔하지 않다. 여동생에게 월경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고 생리대를 훔쳐다 주는 오빠라니. 나는  시퀀스에서부터 자인이 무슨 일을 하든 그가 선하다고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자인과 사하르의 비밀은 오래가지 못한다. 부모의 결정에 따라 11세의 사하르가 나이 차이가 20살은    같은 아사드에게 시집가게 된다. 자인 가족이 살고 있는 아사드 아버지의 건물에서 쫓겨나지 않는 조건으로 매매혼이 성사된 것이다.




자인은 사하르를 구하기 위해 탈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아이의 계획은 부모의 눈을 속이는데 실패한다. 사하르가 아버지의 스쿠터를 타고 납치되듯 시집보내지고, 절망한 자인은 사하르와 함께 타려던 시외버스에 혼자 오른다.



자인은 시외버스를 타고 우연히 다다른 곳에서 불법 체류 중인 에티오피아인 라힐을 만난다. 앳된 엄마 라힐은 아기를 뺏기고 추방당할까  전전긍긍한다. 아이 아버지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외면한 라힐은 스스로의 삶도 버겁다. 그렇지만 라힐은 자인을 외면하지 않는다.




 라힐에게는 일하는 시간에 아기를 봐줄 사람이 필요하고, 자인에게는 일이 필요하다. 자인은 라힐의 아기 요나스를 봐주며 같이 살게 되어 불법 체류자들과 시리아 난민들의 세계에 섞여 든다.





자인은 요나스를 돌보는 라힐을 불편하고 낯설게 본다. 자인에게는 서로를 사랑하는 엄마와 아기의 모습이 낯선  같다. 요나스를 돌보는  이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자인을 보며 잠시나마 안도하게 되는  관객일 것이다. 자인은 사하르를 그리워하고, 가끔은 혼자 평온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같기도 하다.  





자인과 육탄전을 벌여 사하르를 기어코 시집보내는 자인의 엄마와 대비되는 라힐의 모습은 모성을 얘기하지만, 영화는  모든 것을 엄마의 책임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자인이 만나는 어른들과 자인 부모의 이야기는 길게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지옥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

사하르처럼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해야 했던 자인의 엄마...

아기를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떠는 라힐...

자신의 절망에만 골몰해 가족을 돌보지 않는 무기력한 자인의 아빠...

자신은 사하르를 잘 대해줬다고 항변하는 아사드.......

라힐의 불행을 이용해 요나스를 빼앗아 팔아넘기려는 아스프로...





어느  라힐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잠깐의 평온은 깨어지고 자인은 혼자 요나스를 돌보며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자인은 시장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 소녀 마이순에게서 돈만 있으면 북유럽에 가서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꿈을 꾼다. 자인은 그의 부모에게 배운 유일한 기술로 돈을 모으며 요나스와 함께 스웨덴에 가서  날을 그려본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고, 자인은 또 한 번 절망하게 된다. 그런 자인에게 그의 부모와 같은 딜레마가 주어진다.

요나스를 넘겨주면 돈을 주겠다는 아스프로의 제안이 그것이다.

자인은 그의 부모처럼 요나스를 넘겨주고 돈을 챙겨서 혼자 떠날 것인지, 둘이서 떠돌다가 죽을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아스프로는 요나스를 입양 보내서 잘 살게 해 준다고 약속하지만 자인은 그 말을 믿을 만큼 어수룩하지 않다. 자인은 죽을힘을 다해 버텨본다. 그러나 자인을 도와주는 어른은 한 명도 없고 라힐은 언제 돌아올지 기약조차 없다.

자인에게 부모와 같은 딜레마를 던지지만, 영화가 ‘부모를 이해하는’ 자인의 모습을 그리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






영화는 자인의 부모도 하고 싶은 말을 하게는 해주지만, 그들을 연민하고 옹호하는데 분량을 쓰기보다는 자인의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집중한다.

자인에게는 크게 말할 자격이 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고작 열두  아이가 모든 것을 걸어왔으므로.  





부모에게서 여동생을 지키려다 실패하고, 우연히 맡게 된 아기를 세상으로부터 지키려는 자인은 지치고 절망하지만 분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자인의 눈빛은 자식의 노동력을 착취하다 못해 매매혼시키는 부모의 무기력하고 잔혹한 모습에 저항하듯이 또렷하고 단호하다.





자인 캐릭터에 힘을 실어주는  배우 자인  라피아의 뛰어난 연기력과 카리스마다. 아직 소년이지만 자인  라피아의 카리스마는 성인 무비스타들 못지않게 강력하다. 그가 시리아 난민으로 레바논 거리에서 물건 배달하는 일을 하다 캐스팅이 됐다는 배경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아니다.





자인 알 라피아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그와 같이 많은 장면을 연기한 아기 요나스의 공도 크다. 두 어린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의 합은 대사가 거의 없음에도-요나스는 옹알이를 하는 아기다-풍부한 멜로드라마를 자아낸다.

 




이 영화의 어마어마한 흡인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이 영화의 시작은 레바논 베이루트의 빈민가이지만, 도달하는 지점은 양육이 부재하는 현실이 대물림되는 세상 전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인은 부모에게 분노하지만, 만약 자인이 집에서 탈출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부모와 다른 삶을   있었을까?

그 집에 자인이 계속 남아있었다면 그 또한 무기력하고 가족에게만 권위를 내세우는 아버지를 닮아갔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양육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아이들이 레바논 베이루트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낯선 도시, 낯선 언어의 영화가 그저 먼 곳의 이야기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다행인 것은, 자인 알 라피아를 비롯해 이 영화에 출연한 비슷한 배경의 배우들을 돕기 위해 영화 제작진이 가버나움 재단을 만들었고 유니세프의 도움도 받아서 배우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수많은 자인과 사하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배우들의 해피엔딩만으로는 진정한 해피엔딩에 이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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