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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시월 Jan 26. 2019

착한 아이라는 악몽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


 나는 어렸을 때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의 짐을 덜어주고 기쁨이 되어주는 그런 착한 아이.   

내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부모님에게 필요한 착한 아이는 두 분의 기분에 따라 바뀌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님의 모든 기분에 부합하는 착한 아이가 되기란 불가능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실을 몰랐고, 어른이 된 지금은 알고는 있지만 여전히 착한 아이가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때때로 무능하게 느껴진다.



우리 모두는 각자 살아온 집안 양육자들의 기준에 맞는 착한 아이가 되려 한 번쯤은 노력해봤을 것이다.

그 무용한 노력은 결코 응답받을 수 없기에 서글프다.


지난주 종영한 MBC 수목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는 그렇게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릴 때 읽었던 전래동화 <해님 달님>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드라마 속 동명의 동화책 <붉은 달 푸른 해>가 계속 떠오른다.

극 중 학대받는 아이 빛나가 이런 얘기를 한다.




붉은 달 푸른 해 동화책에서처럼 엄마가 무서운 호랑이 탈을 쓴 것이라고,
진짜 엄마는 그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착한 아이가 되면, 성적이 더 좋아지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빛나는 남편과 이혼 후 딸의 성적에 집착하며 학대까지 하게 된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빛나를 지탱해준 건 예전의 좋은 엄마가 호랑이 탈을 쓴 것이고, 자신이 더 노력하면 좋은 엄마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다.

빛나의 엄마가 무서운 엄마가 된 건 빛나의 잘못이 아닌데 빛나는 그렇게 믿으며 학대를 견뎌왔다.




이 드라마는 아동학대를 한 어른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죽게 하는 '붉은 울음'이라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아동심리상담가(김선아 배우)와 형사(이이경 배우)가 그 과정에서 학대당하던 아이들을 발견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누가 봐도 학대받는 아이부터 빛나처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학대, 주인공인 아동심리상담가 차우경이 받아온 정서적 학대까지 여러 가지 모습의 아동학대로 채워진 에피소드들은 보기 힘겨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때 양육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던 사람이라면, 어른이 되어서도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면 심리상담을 받는 것처럼 위로가 될 수도 있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왜 아동학대가 일어나고 어떻게 은폐되는지 심도 있게 들여다본다.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학대를 견디고 있는 아이들과 각자의 이유로 아동학대를 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보여진다.

가장 큰 미스터리를 가지고 있는 관계는 차우경과 새엄마의 관계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차우경이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이혼했다고 얘기하고 새엄마는 상처 받은 우경에게 전혀 공감해주지 않고 차갑게 비난한다.

그러자 우경이 격분해서 화를 내고, 새엄마가 우경의 뺨을 때린다. 내게 이 장면이 특별했던 건 그다음에 이어진 우경의 반응 때문이었다.


우경은 새엄마에게 싹싹 빈다. 눈물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서 절박하게.


그 장면을 보면서부터 우경이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진짜 살아 숨 쉬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제 3자가 보기에는 새엄마가 잘못하고 있고 우경이 화를 내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는데 우경의 기준은 다르다.

우경의 기준은 새엄마의 반응이다. 새엄마가 좋게 반응하면 옳게 행동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다.




드라마에 등장한 학대받던 모든 아이들은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에게 지배받고 있다.

아이들이 학대하는 사람을 사랑하든 미워하든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은 같다.



우경처럼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 병든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가족관계가 유난히 절대적인 우리나라에는-법의 기준조차 가족 유지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착한 아이라는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른들이 많을 것이다.





우경이 보여주는 희망은 묻히고 지워진 상처 받은 아이들을 발견하기 위해 다들 외면하는 진실을 찾기를 멈추지 않는 집요한 모습이다.

비난받고 그로 인해 때로는 흔들리지만 우경은 기어코 세상의 눈에서 지워진 아이들의 악몽을 찾아낸다.




<붉은 해 푸른 해> 동화에서 언니가 무서워하는 동생을 위해 자리를 바꿔주듯이, 녹색 옷을 입은 소녀가 우경의 눈물을 닦아주듯이...

상처 받은 사람들이 햇빛에 상처를 드러내고 서로를 보듬을 때 희망이 생겨난다.



상처를 숨기고 부정하며 혼자 고립되어 갈 때 그가 기댈 곳은 따스한 마음이 아니라 복수하는 처단자밖에 없다.

이 드라마는 상처 받은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상처를 왜 그토록 숨기고 지우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 원인은 개인의 내면에도 있고, 우리 사회의 내면에도 존재한다.

상처 받은 사람이 그 상처를 용감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그 상처를 볼 용기를 가져야 하며,

그가 받은 상처만으로 상처 입은 사람을 규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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