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제철채소 판매왕이 되겠어
인생은 농담이다. 농담으로 뱉은 말이 실제로 일어나니깐. 회사에서 잘린 지 반년이 지났고, 대학원 준비도 뜻대로 되지 않아서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였다. 식물을 공부하는 친구 웅이 봄이니깐 냉이 캐러 가자고 말했다. 지난여름에 봄이 오면 같이 냉이 캐러 가자고 했는데, 난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나 보다. 이미 경기도 고양의 찬우물 농장 농부에게 공짜로 냉이 캐는 것을 허락받아왔다.
냉이 캐는 건 힘들고 그냥 그랬다. 일단 허허벌판에서 꽃샘추위를 정면으로 맞아 콧물이 질질 흘렀다. 농부는 분명 지천에 냉이라고 했는데, 난 땅 위에 쑥이나 잡초나 냉이나 모두 똑같이 보여서 허튼 호미질만 해댔다. 찬 바람 속 밭에서 쭈그려 앉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심지어 냉이 캐는 것 마저도'라고 생각했다. 점심때가 돼서 농부가 같이 먹자며 오두막 같은 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호구 조사가 시작됐다.
‘젊은 분이 냉이를 캐러 오다니, 뭐 하시는 분이에요?'
당시 커피빈에서 파트타임 일을 했는데, 뭔가 33살에 커피 아르바이트한다고 말하기엔 체면이 안 섰다. 그래서 변명을 늘어놓느라 아무 말이나 해댔다.
“지금은 광화문의 커피빈에서 설거지랑 청소 등등 잡일 하는데, 이제 제대로 된 일 좀 찾아보려고요. 이 농장 참 좋네요. 여기 혹시 일자리 있나요? 이전에 회사에서 영업이랑 마케팅을 했는데 꽤 잘했는데, 여기 인턴자리 있음 할게요. 연봉 싸게 부를게요 ‘
농담이다. 난 영업을 잘못한다. 이전직장에서 잠시 영업을 했지만, 목표 달성은커녕, 숫자감각과 전략 없이 움직인다는 평가를 들어 입사 3개월 만에 마케팅 팀으로 부서를 옮기라는 말을 들었다. 남들이 영업을 못한다 해도 하고 싶었다. 회사에서 금쪽이 취급을 받아도, 숫자 이해력이 떨어져도, 팀플레이를 잘 못해도, 영업이 하고 싶었고, 잘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여하튼 그곳을 퇴사하고 얼른 이력서를 써서 취업을 하려고 했는데 좀처럼 써지지 않았다. 채용사이트에 올라온 기업들 중 애정 가는 제품을 파는 곳이 없었다. 우선 지원동기라도 쓰려면 좋아하는 제품이어야 한 줄이라도 쓸 테니깐.
냉이 캔 그날 이후, 매일 냉이를 먹어 치우며 이력서를 쓰는 둥 마는 둥 하던 늦봄 어느 날. 웅이 찬우물 농부가 이번 주말 마르쉐에서 야채를 판다는 소식을 줬다. 야채라니. 잘 팔 수 있을 거 같았다. 채소 요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야채 자체를 좋아한다. 주말마다 식품관 야채코너 아주머니들과 야채 이야기를 했고, 집에 와서 양배추를 부둥켜 안거나 못생긴 호박을 어루만지며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 웅에게 다짜고짜 야채 잘 팔 수 있으니 농부에게 가겠다 전해달라고 하고,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시장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요란하게 팔았다. 짤랑거리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야채를 소개했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사랑스러운 야채들이 팔려갈 때마다 행복했고,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올라갔고,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그날 가장 선명한 기억은 처음 대파를 팔았을 때 받은 천 원짜리 세장의 감촉이다. '내가 돈을 벌고 있다'라는 사실이 물리적으로 와닿은 첫 경험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했지만 월급은 통장에 한 줄로 흔적만 남긴 채 스쳐갔다. 업무도 그랬다. 마케팅, 기자로 일한 7년간 일이 신기루 같았다. 내 글은 모니터 속에 둥둥 떠다녔고, 읽어주는 독자도, 그들의 표정도 모니터 너머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조회수나 공감수, 광고비용 등 숫자로 정량화돼 기록됐지만, ‘진짜 누가 읽었을까’, ‘광고 조회수는 높은데, 왜 구매로는 연결이 안되는지’ 답답했다. 근데 시장에서 야채를 파니 궁금했던 모니터 너머의 과정이 눈앞에 펼쳐지고 만져졌다. 지나가던 사람이 내 말에 걸음을 멈추고, 표정을 보며 공감과 설득을 하고 결국 지갑을 열어 천 원짜리 세장이 내 손에 쥐어지는 감촉. 글쟁이 7년 차에도 모니터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며 카피라이팅을 했는데 이날 장사가 처음이었는데 그럴싸한 말이 술술 나왔다. 머리보다 몸으로 일하는 게 더 직관적이고 재밌다는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했다.
하도 요란하게 팔아서인지, 이웃 농부들이 와서 찬우물 농부에게 물었다. '이 아가씨 뭐예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인사해. 배추도사야, 오늘 일일 판매원‘ 4년 전 아무렇게나 지은 닉네임이 진짜 농부들 앞에서 쓰일 날이 올 줄 몰랐는데, 농부들은 ‘배추도사는 배추 농사를 잘 짓는 거냐’며 반가워했다. 장사 4시간 동안 계속 농부에게 계속 일하고 싶다고 어필했다. “장사는 농부님보다 제가 나은 거 같아요. 제가 팔테니 농부님은 뒤로 빠지시고요. 봉투 좀 받아와 주세요“, ”저 반백수라 장터 열릴 때마다 다 나올 수 있어요“, ”저 야채 정말 좋아하고요, 야채 장사 정말 재밌네요“ 그날 농부가 가져온 채소와 꽃, 모종을 거의 다 팔았다. 싱글벙글 웃던 농부님의 모습에 나도 뿌듯했다. 정확히는 세일즈로 처음 누군가가 웃은 것에서 나의 가능성을 봐서 신났다.
며칠 뒤 인스타그램 DM으로 농부에게 연락을 받았다. 앞으로 장터 날짜를 주며 장사를 도와달라고 했다. 오랫동안 영업이 하고 싶었다. 간절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낯선 사람에게 기회를 받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근데 계획했던 대로가 아니여서 더 재밌고 기대됐다. 그래서 5년간 꾸준히 다니던 주말 산행도 설렁설렁하고 취업준비는 더 대충하고 대신 사람의 온기가 가득한 시장에서 장사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채소시장 장사를 하게 됐다.
[장보기와 야채 정보]
1. 농부시장 마르쉐: 땅을 돌보는 제철 채소와 과일을 기르는 농부들의 농산품을 살수 있는 게릴라 시장입니다. 수공예와 신선한 디저트 커피를 팔기도 합니다! https://instagram.com/marchefriends?igshid=OGQ5ZDc2ODk2ZA==
2. 고양시 찬우물 농장 농부 인스타그램: https://instagram.com/lsangrin.coolwell?igshid=OGQ5ZDc2ODk2ZA==
3. 찬우물 농장 블로그: https://m.blog.naver.com/lsrajm
4. 친구 웅이 운영하는 식물 공동체 샐러드연맹 뉴스레터 구독하기: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75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