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는 흙 속에서 피어난다.
* 이 매거진은 Eli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치유는 아주 소박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어떤 순간에 살짝 만지는 것, 별것 아닌데 사람이 휘청하는 것, 그냥 울컥하는 것, 기우뚱하는 어떤 순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치유자가 될 수 있어요. 더구나 지금과 같은 때는 더 그렇죠.
-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정혜신, 진은영)
"언제 오냐?"
통화가 연결되자 아빠는 내가 친정집에 언제 오는지부터 물으셨다.
"너 주려고 몬스테라 분갈이해놨다." 남편이 쉬는 날 가겠다고 답하자, "알았다." 아빠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게 가라앉았다. 핑계를 꺼내기도 전에 전화는 뚝 끊겼다.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있다가 베란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난주, 아빠 집에서 가져온 벌레잡이제비꽃의 바닥 이끼가 바싹 말라있었다. 얼른 분무기를 들어 쫙쫙 뿌려댔다. 이른 아침이지만 뜨거운 햇살이 베란다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가로로 줄지어 놓인 화분 중, 물을 맞은 잎사귀들만 반짝거렸다. 방울처럼 맺힌 빛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휴대폰을 들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갈게요."
농촌과 어촌의 경계에서 보낸 유년 시절, 밤마다 천장에서 100m 달리기를 하던 쥐들보다 알을 낳는 암탉들의 비명 소리가 더 싫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동생을 두고 마루로 나왔다. 앞마당 텃밭 울타리 너머에 아빠가 서 계셨다. 술 담배를 멀리하신 아빠는 합기도, 유도, 태권도 공익 10단이셨다. 하얀 러닝셔츠를 뚫고 드러난 울퉁불퉁한 근육들이 아빠의 뒷모습을 더욱 크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일부러 미닫이문을 드르륵 소리 나게 밀고 나왔다. 아빠는 뒤돌아보지 않으셨다. 분홍 슬리퍼를 신고 아빠 옆에 서서 작물들을 유심히 살폈다. 아홉 살 나는 "잘 잤니?"라는 아빠의 아침 인사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하고 말을 건넬 수도 있었겠지만 아빠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고 나는 살갑지 못한 딸이었다. 아빠가 마당에서 팔 굽혀 펴기를 하려고 몸을 숙이면, 나는 미리 따둔 호박과 상추를 가지고 주방으로 향했다.
도시로 이사한 뒤에도 나는 매일 아침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왼쪽 손목에 끼워둔 고무줄로 머리를 대충 묶고 방문을 열면 거실에는 늘 아빠가 앉아계셨다. 길게 뻗은 원목 좌식 테이블 위에는 영문 서적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이면지 곳곳에는 까만 필체가 등 너머로 보였다. 곁에 있던 낡은 사전이 배를 벌리면 아빠는 형광펜으로 문신을 새기듯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샤프심으로 이면지를 긁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뒤에도 아빠의 모습을 그대로였다. 단지 테이블에 올려진 책이 영어책에서 중국어 책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50대의 문턱을 넘어서도 아빠는 매일 운동할 시간을 따로 떼어 몸을 단련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현관에 쌓여있는 깜지가 대변해 주었다. 나는 엄마에게 종종 묻곤 했다. 엄마보다 키도 작고 못생긴 아빠와 왜 결혼했냐고. 그때마다 엄마는 같은 대답을 하셨다. 아빠는 단단한 사람이어서 좋았다고, 비록 조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 표현에 서툴지만 가족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성실함이 아빠의 매력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나는 가끔 아빠의 삶이 너무 틀에 박혀 재미없어 보이기도 했으니까.
5년 전 초 여름, 아빠의 단단했던 삶은 무너졌다. 뇌경색으로 쓰러져 왼쪽 다리와 팔, 손에 마비가 왔고, 언어의 미묘한 장애가 남았다. 건강한 삶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아빠였기에 가족들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빠가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실 거라 믿었다. 충분히 재활하면 쓰러지기 전과 다를 바 없이 회복되리라 믿으며 아빠의 두 팔을 잡고 일으키려 애썼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날 때까지 그 희망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아빠보다 상태가 더 나쁜 어르신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자꾸만 속으로 비교하게 되었다. "아빠보다 몸이 불편한 분들도 다 운동하고 웃으면서 즐겁게 살아가는데... "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쓴 약을 삼키듯 꾹 눌러 넘겼다. 비슷한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과 만나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모임을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빠는 더 깊은 굴속으로 숨어버렸다.
가족이 내민 손이 점점 느슨해지자 "치유"라는 말도 조금씩 흐려졌다. 친정집에 가는 일도 줄었다. 방에 우두커니 앉아있거나 누워 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어 금세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아빠가 1년 전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반찬거리를 두고 집으로 가려는데 아빠가 나를 불렀다.
"이거 가지고 가. 꽃 피면 이뻐."
"아빠, 제가 화분 키우면 다 죽이는 거 아시잖아요. 결혼하고 40개는 죽였는걸요."
"괜찮아. 이건 키우기 쉬워."
진분홍 꽃 세 송이를 단 화분이 아빠 손바닥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겐빌레아 화분은 내 손에 들려졌다. 그러고 보니 친정집 거실 여기저기에 처음 보는 화분들이 눈에 띄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너희 아빠 원예 치료하잖아."
"원예 치료요?"
건강했던 몸을 그리워하며 우울감에 휩싸였던 부모님. 자주 화를 터트렸고 슬픔을 쏟아냈지만 엄마는 늘 곁을 지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엄마는 집 앞 화훼 농원에서 화분을 여러 개 들여왔다. 사람을 만나지 않더라도 식물과 꽃을 보면 마음이 정화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아빠가 너 주려고 인터넷으로 흙이랑 영양제도 직접 구입하셨더라."
나는 한동안 아빠가 치유를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스스로를 절벽 끝까지 밀어 넣고, 그 아래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게 된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을 것이다. 치유는 결국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안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임을 아빠는 어쩌면 그 긴 시간 속에서 깨달으셨을지도 모른다. 아픔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엄마가 사 온 식물을 돌보며, 조용히 배워가고 계셨던 건 아닐까.
아빠가 내게 건넨 부겐빌레아 화분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아침마다 보았던 아빠의 등이 떠올랐다. 아침에 눈을 뜨면 화분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이름을 불러주셨을 것이다. 딸에게 선물할 화분을 고르며, 혼자 미소도 지으셨을 것이다. 베란다 끝, 좁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신문을 넓게 펼쳐 놓고, 굽은 왼손을 품에서 꺼내어 흙을 만지고, 화분을 옮기는 그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셨을 것이다.
사람 마음을 어떤 순간에 살짝 만지는 것, 별것 아닌데 사람이 휘청하는 것, 그냥 울컥하는 것, 기우뚱하는 어떤 순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순간이다. 치유의 순간은 아주 소박하다는 책의 문장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