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판의 고기가 된 것 같아"

37도 폭염도 식힌 은콩이의 말 한마디

by 서사이

“어제 서울 기온이 37.8도까지 오르며 118년 만에 최고 기온을 기록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 그렇다고 챗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을 멈출 수는 없죠.


학교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은콩의 앞머리가 그새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어머, 이 땀 좀 봐. 은콩이 더워?”


“응.”


“낮엔 더 덥다는데 괜찮을까.”



손부채를 열심히 흔들어 이마의 땀을 식혀주는데 눈을 감고 헥헥거리던 아이의 입에서 의외의 표현이 튀어나옵니다.



“불판의 고기가 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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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판의 고기’란 표현이 낯설면서도 얼굴이 발개진 아이의 상황에 찰떡같단 생각을 했거든요.



아이만의 언어는 어떻게 태어날까


“우리 은콩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신기해서 물었어요.


보통은


‘더워’

‘더워서 미치겠어’

‘더워서 죽을 거 같아’


이런 표현들이 일반적이잖아요.


그런데 ‘불판의 고기’라뇨?


“엄마가, 나 데리러 왔을 때 ‘아유 우리 은콩이 익었네 익었어. 얼굴이 익었어.’라고 그랬거든. 그래서 내가 고기인가? 그랬지.”


며칠 전 은콩이 엄마가 은콩이를 학교 앞까지 마중 나갔을 때 일이었대요.


무더위에 유독 얼굴이 빨개져서 나오는 은콩이를 보고 ‘익었네’라는 표현을 썼던 거죠.


엄마는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은콩이는 ‘익었네’라는 단어를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자기만의 언어로 재창조한 거였어요.


‘불판의 고기’라고 말이죠.


아이가 가진 언어감수성과 상상력이 놀랍지 않나요?


아이들은 어른의 말을 흘려듣지 않아요.

귀 기울이고, 마음에 담고, 상상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꺼내죠.



은콩이의 특별한 언어 사전



은콩이는 은콩이만의 특별한 표현들이 있어요.



지난주 제가 만든 스파게티를 먹으며 은콩이가 말했어요.


“이모, 입이 자꾸 더 달라고 해. 그래서 멈출 수가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너어무 맛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루는 치과에 송곳니를 빼러 갔어요.


일주일 앓던 이를 뺀 은콩이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이었죠.


그날 오후 아이는 송곳니를 주머니에 쥐고 다니며 시시 때때로 꺼내보고 행복한 웃음을 짓곤 했어요.


“뭐가 그렇게 좋아?”


“내 송곳니에 반-해버렸어.”


은콩이는 ‘귀엽다’ 거나 ‘예쁘다’는 표현 대신 ‘반했다’는 말을 자주 써요. 아이가 느끼는 사랑스러움과 애착이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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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런 표현도 있어요.


숙제가 많아서 혼자 낑낑대고 있을 때가 있었거든요.


“스트레스가 내 키보다 높이 쌓였어.”


아이가 느끼는 스트레스의 크기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어요. 안쓰러우면서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더라고요.



언어가 만드는 작은 기적



“우리 은콩이 많이 더웠겠다.” vs “우리 은콩이 익었네. 빨갛게 익었어.”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남나요?


어떤 표현에서 더 따스한 정감이 느껴지세요?


피식, 하고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말을 어느 쪽인가요?



단순히 “더워”라고 했다면, 불쾌한 감정이 담겼을 말이 ‘익었다’, ‘불판의 고기’ 같은 특별한 표현 만으로 미소가 빙그레 지어지는 따스한 말이 되었어요.


혹시 어릴 때 이런 경험 없었나요?
어른들이 깜짝 놀랄 만한 표현을 써서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기억이요.

그때의 기억이 지금 뒤돌아 봐도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 않나요?



평범함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



은콩이의 말을 들으면서 ‘저는 어떤 말을 쓰고 있나’ 되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냥, 무심코 하는 말’이 생각보다 많던걸요. 조심한다고 하지만 때론 무의식 중에 날카로운 말을 건넬 때도 있고요.



하지만 은콩이의 말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의 마음을 쓰다듬고 누군가의 세계를 풍요롭게 채우기도 해요.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죠.



“불판의 고기가 된 것 같아”라는 그 말 한마디가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웃을 수 있었거든요. 찜통더위마저 잠시 잊게 만드는 힘이죠.



상상력이 그리워지는 시대



명확하고 간결한 대화법이 환영받는 시대. AI는 정확한 명령어를 요구하고 일상에서도 효율성이 우선시되는 시대를 살고 있어요. 앞으로는 더 그렇겠죠.


대화에 녹일 수 있는 작은 위트나 농담 따위 불필요한 것으로 검열되고 삭제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쩌면 그런 시대일수록, 은콩이의 말처럼 상상력이 담긴 말이 더 그리워 질지도 몰라요. 때론 완벽한 문장보다 상상력이 더해진 표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웃음의 여유를 가져다주니까요.



그래서 평범한 표현에 상상력을 담아보면 어떨까 생각해 봤어요.



“피곤해” 대신 “배터리가 5%밖에 안 남았어.”

“속상해” 대신 “마음에 비가 내려.”

“기뻐” 대신 “마음이 춤을 추고 있어.”



왠지 오그라드는 느낌이지만, 일단 은콩이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보려고요.


은콩이 엄마의 “익었다”라는 말처럼,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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