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任)은 내가 쓴 소설이 왜 해피엔딩이 아니냐고 묻는다. 당연하다. 작가가 가슴 아린 것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난생 처음 읽었던 장편 『도련님』을 가득 채운 소동은 잊어도 할멈이 양원사라는 절에 봉안되었다는 마지막 한 줄만은 잊지 않고, 『삼국유사』가 아무리 거짓이라도 지귀(志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연심만은 어떤 진실보다 진하게 기억하는 나다.
"모든 사람에게 우물 같은 슬픔이 있어, 그 모든 샘의 수원(水源)이 되는 전인류의 슬픔이 호수처럼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읽고 스스로 남의 슬픔에 잘 공감하는지 반성해본다. '그런 글을 써야지' 싶다가도 '자전적 서사에서 집단적 서사로의 발전' 같은 딱딱한 말이 앞을 가로막아서 나아가기를 포기한 적도 여러 번이다.
코로나가 기승이던 시절, 컴퓨터학원에서는 매일 체온검사를 했다. 어느날 나는 가슴이 파인 옷을 입은 선생 앞에 이마를 내밀면서 시선을 돌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직장에 이런 옷을 입고 오나?' 속으로 그녀를 욕하면서.
그로부터 수 년, 네이버 계정을 정리하다 학원에서 가입한 카페를 발견했고, 이것저것 보다보니 어느새 그녀의 블로그까지 와 있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회화 작품들은 하나 같이 세피아색 우울을 닮아있었다. 내가 취업을 위해 학원을 다니던 그 시절에 그녀도 여러 가지 고민을 했으려나. 나는 그 순간 그 사람의 슬픔을 마주한 셈이었다.
컴퓨터를 끄고 앉아 다시 한번 수업시간을 떠올린다. 시종 말의 높낮이가 없던 그녀, 늘 모니터를 응시했지만 이제는 후텁한 공기만 기억나는 어두운 교실. 디자인마다 넣던 로렘 입숨.
우리는 모두 서로의 로렘 입숨을 마주하고 사는 것일까. 그 아래 비할 바 없이 깊은 슬픔이 흐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