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건조함을 느끼는 요즘이다. 거울 속의 무기력한 얼굴을 마주하고 걸음을 옮길 때, 혹은 직장인들 옆에서 밥을 먹고 나올 때 그렇다. 특히 살을 에는 거센 바람이 불 때면 나는 추위보다도 건조함이 얼굴의 습한 곳을 틀어막는 느낌이 더 괴롭다.
건조함은 지난 가을에 처음 찾아왔다. 좁은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시말서를 쓰고 꾸지람을 듣던 무렵이었다. 잔뜩 위축된 채 바보짓을 하고 혼나기만 반복하는 악순환에 인간미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네들이 하는 말을 다 듣고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갈 때 카펫 위에 발이 끌리는 마찰에서 먼지가 이는 것을 느낀 것이 시작이었다.
지옥의 쳇바퀴에 지쳐가던 나는 어느 날 업무 중에 거짓말을 했다(내내 나를 못미더워하던 상사가 웬일로 골을 내지 않던 날, 실수를 해놓고 밉보이기 싫어 거짓말을 한 운명의 장난 같은 상황이었다). 전까지는 상급자가 나더러 거짓말을 한다고 매도해도 열심히 해서 확증편향을 걷어낼 수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얼결에 정말로 거짓말을 해버리니 눈앞이 캄캄했다. 폐를 끼치며 자리를 보존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나는 그날로 퇴사를 결심했다.
도망과 다름없는 결정을 하고 나오며 나는 “외동으로 귀하게 자라서 역경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다”던 심리상담사의 말을 떠올렸다. ‘그럴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준 말은 왜 꼭 ‘그러니 요 모양이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생각나는 걸까. 바깥공기는 건조했다.
자괴감은 미움이 되었다가 더 큰 자책으로 부풀었다 하며 속에서 뒤놀았다. 요령을 피우는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접하면 ‘저런 새끼들도 잘 사는데 나는 왜…’ 싶은 울화가 치밀다가도 ‘도대체 나는 무엇이 부끄럽고 두려워 뻔뻔하게 살지 못하는 것인가’ 스스로를 비난했다. 정말 나는 무엇을 바랐기에 열심히 매 순간 마음 졸이고도 이런 후회를 하는 것일까.
박차고 나왔는가, 못 버텨 나왔는가―끝없는 내적 갈등 속에 겨우 깨달은 것은 나 스스로가 건조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너무 촉촉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의욕이 과하고, 자기주장도 강하고, 주눅까지 잘 들어서 여러모로 부려먹기 힘든 사람, 설상가상으로 스스로를 죽이는 법을 알지 못해서 본인도 괴로운 녀석. 하릴없이 마른세수를 하면 피부 아래 찰박하게 고인 습기가 느껴진다. 그것은 곧 곰팡이가 피었을지 모른다는 망상으로 번진다.
요즘 나의 하루는 새벽동안 블라인드 뒤에 숨어있던 창문의 습기를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뿌옇게 서려서는―내가 숨어든 방에서 바쁘고 매서운 도시가 보이지 않게 하는 결로. 언젠가 곰팡이가 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것은 역시 속세를 멀리하고 싶은―곰팡이 핀 마음의 소관일까.
나는 오래도록 음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