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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목수가 되고 싶어요

2023.5.2(화)

by 박달나무

기록적인 날이다. 우리는 에누리없이 25km를 걸었다. 아침 8시 정각에 숙소를 떠나 오후 6시에 아소프라(Azofra)의 시립알베르게에 들어갔다. 10시간 동안 아침을 먹고, 중간 간식도 먹고 점심도 먹는 시간이 포함됐고, 나머지는 거의 쉬지 않고 걸었다. 배낭을 <트랜스퍼 서비스> (일명 ‘동키’ 서비스)로 보내고 홀가분하게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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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작은아이가 인솔자를 힘들게 했으니 오늘은 씩씩하게 잘 걷는 날이다. 루틴은 흔들림 없이 돌아갔다.

작은아이는 가장 길게 걷는 날 가장 씩씩한 모습을 보였다. 오후4시를 넘기며 숙소 도착까지 2시간 동안은 힘들어했다. 그러나 웬걸… 저녁 먹는 자리에서 기가 전혀 꺾이지 않고, 피곤한 티도 나지 않았다. 역시 아이들의 체력적 문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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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여자 선생님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짧게 걷는 것이라면 몰라도 길게 걸을 때 손을 잡으면 키가 큰 사람이 많은 에너지를 쓴다.

내가 작은아이와 함께 걸으며 비위를 맞추고 서비스를 하자 큰아이는 숙소 도착할 때까지 혼자 앞서 걸었다.(그래서 작은아이와 많은 얘기를 나누는 기회를 가졌다)

“우리 OO이는 나중에 어떤 일을 하고 싶어? 농사 짓는 일은 관심이 있나?”(드넓은 포도밭을 지나기 때문에)

“저는 목수를 하고 싶어요”

“목수? 그것 대단한 아이디어인데. OO에게 잘 어울려”

“저는 도끼 한 자루가 필요해요. 도끼로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서 멋진 작품을 만들거예요”

“작품을 만드는 목수라면 너 만큼 잘 할 사람은 없을 거야. 필요한 공구가 많겠다”

“아니, 저는 도끼 한 자루면 충분해요”

눈앞에 잘 벼른 손도끼를 들고 현란하게 나무를 다듬는 장인 OO가 보인다. 4년 전 카미노 걷다가 잠시 스친 젊은 독일인 목수 맥스가 떠오른다.

맥스는, 다들 IT쪽으로 진로를 잡기에 목수를 희망하는 독일 청년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은 목수의 길을 계속 걷겠노라 말했다. 맥스가 말한 자신의 직업은 woodworker였다. OO는 wood designer 또는 wood artist가 아닐까….

잠시 고속도로와 나란히 가는 흙길을 걸었다. 도로에 삼각형 안에 사슴이 뛰어오르는 표지가 있어,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냐고 물었다.

“야생동물출몰지역이니 조심하라는 뜻이잖아요”

“정확하게 아는구나. 갑자기 튀어나온 동물이 차에 치어 죽는 걸 무엇이라 하는지 알아?”

‘야생동물출몰’ 낱말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걸 봐서 쉽게 ‘로드킬’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보험처리, 동물보험처리 아닌가요?“

작은아이랑 얘기하다보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재미도 있다.

웃지 않을 수 없다. ‘동물보험처리’라니…. 기발한 대답에 따라 한동안 생각하게 된다.

나는 로드킬을 염두에 두고 말을 던졌지만 상대는 동물보험처리라며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한 경우….이 경우엔 내가 물었고 아이가 대답하지만, <답>은 내가 가지고 있다. 내가 이미 ‘로드킬’ 답을 손에 쥐고 아이를 테스트하는 경우의 대화다. 동등한 입장의 어른들끼리 대화에서 묻는 사람이 답을 쥐고 있다면, 묻는 사람은 매우 싸가지 없는 경우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답>을 제시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아이는 당연히 양육자 어른에 비해 좁은 지식스키마(schema; 배경지식)를 가지고 있고, 체격/체력 조건도 다르다. 따라서 부모/교사/양육자는 <가르친다>는 명분 아래 답을 쥐고 아이에게 질문하는 대화 형식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비극이라고 말해도 좋다)는 어른의 입장에 있다. 내가 미리 준비한 <답>과 어긋난 아이의 대답에 대해 <틀렸다>고 생각하고 아이의 대답을 교정하려는 어른의 시도가 늘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언제나 아이 입장과 시각에서 제시한 개념을 인정할 수는 없다. 결국 교육은 필요하니까. 아이는 계속 성장할 과제가 있다.

일상에서 어른과 아이의 대화는 프로토콜이 있다. 미리 생각하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짜여진 대화의 템플릿에서 순간 순간 화자가 채용해서 입으로 소리를 낼 뿐이다. 나의 말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몸담고 있는 사회의 시간의 축적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말을 구사하는 것인데….

우리 아이들은 이미 마련된 템플릿에서 가져오지 않고 자신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게 좋게 보면 <창의적>이란 평갈 받지만, 흔히 <4차원> 소리를 듣는다. 더욱 심한 경우라면(일방적으로 자기 입장만 표현한다면) <장애>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창의/4차원/장애, 이게 서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이런 약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주장이 진보적 교육자들의 목소리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비정하고 냉정하며, 사실은 부도덕하다. 우리 아이들이 숨쉴 공간이 없다.

아이들은 자기가 거부당할 때 공격적인 감정 표현을 한다. 예를 들면 장거리 걷기로 힘들 때, 과장되게 표현하게 되고, 인솔자인 나는 아이의 호소를 일축하고 계속 걸으라고 명령하는 경우가 카미노에서 자주 일어난다. 내가 소망하는 것은 아이가 자신을 콘트롤하면서(힘든 고통도 참아가면서) 타협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망은 늘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제는 작은아이가 여자 선생님 정강이를 걷어차는 바람에 여자 선생님이 한동안 힘들어했다. 늘 여자 선생님을 가까이 하려고 하면서도 순간 자기 감정을 콘트롤하지 못한 거다. 큰아이는 서운한 감정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하다. 누구나 아이가 불쾌감을 뿜어내는 걸 알 수 있다. 대화를 시도하면 언제나 ’난 불쾌감을 표현하지 않았다‘ 며 숨어버린다.

이 문제는 뽀족한 해결책이 없다. 내 입장에서는 말이다. 무조건 아이를 다 이해해야한다고 말할 수 없고, 나 또한 다 이해하고 품지 않는다. 반대로 ”너희들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몰아 붙일 수 없다. 자칫 아이는 부서질 수 있다. 또는 퇴행할 수 있다. (아이들은 퇴행이 자기를 보호한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듯)

하여튼 오늘 25km 걷기는 기념적이다. 또 25km를 걸을 수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20km만 걸어도 충분하다. 오늘 길게 걸은 것은 숙소에서 개인 시간을 줄이고 아이들을 지치게 해서 일찍 재우려고 의도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 지치기 전에 어른 인솔자가 쓰러지겠다. 25km는 좀 힘드네…. 내 나이면 은퇴하는 게 맞는 듯.

뿌듯한 마음으로 은퇴하고 싶다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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