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30(일)
팜플로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호텔에서 머물고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는데….
10유로 호텔 조식으로는 매우 훌륭해서 아이들도 꽤 많이 먹었다. 나도 좀 과식. 뷔페 스타일이니까 더 먹게 된다.
나는 몸이 무겁다. 아이들은 날아다닌다. 그게 정상이다. 그래서 마음은 무겁지 않다. 나는 <도전하는 연구자>의 입장을 늘 가지고 있다. 도전할 수 있고 연구할 수 있다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스페인 호텔은 11시 체크아웃이다. 여기 사람들은 워낙 늦게 저녁을 먹고 늦게 자기 때문에 아침에 천천히 움직인다. 하지만 순례길 알베르게는 아침 8시 이전에 모두 퇴실해야 한다.
호텔에 머문 덕에 천천히 나와서 팜플로나 버스터미널에 갔다. 오후 1시30분 버스니까 중국인 운영하는 비스트로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버스터미널 지하 아케이드에 풀방구리 쥐 드나들듯 식당과 아케이드를 왔다갔다하며 구경하고 몇 가지 간식과 놀잇감을 산다. 작은 쇼핑은 여행의 묘미라 생각하고 5유로를 건넸다.(스페인 버스터미널은 대부분 지하에 있다. 비스트로는 터미널 입구 길 건너에 있고)
현찰은 두 아이를 붙여주는 본드가 됐다. 실질 구매력이 손에 들어오니 둘이 협력한다. 돈 관리와 횡단보도 건너는 일을 큰아이가 맡았지만 순순히 작은아이가 따른다. 어떠한 잔소리와 설득도 불가한 일을 <돈>이 쉽게 이루어낸다.
당연히 구매력이 협력을 만들었기에, 구매력의 소실은 협력의 중단이다. 웃기지만 씁쓸한 기분이다. 나에게 미션을 주는 사례다. 구매력과 상관없이 협력을 이루려는 시도를 수십 년 해왔다. 솔직히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정! 구매력은 그대로 두자.
<돈>이 아닌 구매력을 찾아나섰다. 이번 여행도 그런 시도 중 하나인데 돈 없이 여행 없으니 <돈>의 존재를 모른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개인은 개인대로 노력하겠지만, 돈을 쥐고 있는 정부/지자체의 지출 방향은 매우매우 중요하다. 결국 정치아니겠는가.
이제 내게 정치는 기도의 영역이 됐다. 나는 개인 영역에서 성실하게 노력하다가 은퇴하는 길에 있다.
버스로 로그로뇨(Logroño)에 왔다. 이틀 걸을 거리를 스킵핑. 숙소 구하기 어렵다는 조건, 정해진 날짜에 산티아고성당에 도착하기 위한 조치다.
로그로뇨는 2천 년 전 로마군이 이베리아 반도 정벌에 나섰을 때 군사기지로 만들어진 도시다. 당시 유적이 약간 남아있다. 팜플로나가 나주였다면, 로그로뇨는 광주의 성격이다. 물론 한국의 광주광역시를 생각하면 안된다. 광주가 물리적 크기는 훨씬 크다.(스페인은 광활한 국토에 한국보다 적은 인구다)
로그로뇨 에브로 강가에 있는 방갈로를 얻었다. 메이데이 연휴에 방을 구할 길이 없었는데 30만원 이하로 유일하게 남은 방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우리가 얻은 방은 침대가 12개(이층침대 6개)다. 룸에 딸린 화장실과 샤워실도 있다. 아이들은 <골라자는 재미>가 있다고 좋아한다. 그렇다고 두 침대를 차지하지 못하는 법인데 말이다.
방갈로 입구 철제 출입구에 <로그로뇨 시내 캠핑장>이라고 써있다. 내일 메이데이라서 캠핑 차량이 계속 들어온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산타마리아 대성당 마당에 임시 공연장이 설치되고, 동네 아이들 다 나와 놀고 있다. 우리도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골라먹는 재미로 아이스크림 사먹었다(베라 아님)
캠핑장 바로 앞 레스토랑에는 결혼식 피로연이 열리고 있다(폐장 분위기)
파티장에서 작은아이가 헬륨풍선을 하나 얻었다. 아이는 풍선을 하나 더 얻을 생각에 파티장으로 가려고 하는 찰라, 큰아이가 제안을 했다.
“풍선을 가지고 가서 또 달라고 하면 주지 않을테니, 내가 잠시 네 풍선을 가지고 있을게”
작은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큰아이에게 풍선을 맡겼다.
나는(이 글을 읽는 분들도 마찬가지) 잠시 후 벌어질 일을 예상했다. 예상대로 사태는 벌어졌다. 내 예상이 일어나지 않게 내가 개입할까 살짝 고민했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나야 하고, 그 또한 겪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지켜만 봤다.
큰아이는 아슬아슬하게 풍선을 놓쳤고, 헬륨풍선은 하늘로 사라졌다. 작은아이도 목격했다. 하지만 풍선을 새로 얻을 생각에 작은아이는 미소를 짓고 파티장으로 돌아갔지만…. 더이상 풍선이 없다는 반응에 급격히 다운….
다음 상황 또한 예상했던대로.
원망은 큰아이에게 향했다.
“나는 풍선 묶은 실을 다시 잡을 생각이었다구. 근데 풍선이 생각보다 빨리 하늘로 올라가서 놓쳤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구….”
우리의 삶은 언제나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다음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한다. 사회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에 사태 발생의 루틴이 있다. 하지만 사건은 일어난다.
후회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자는 말이 아니다. 일종의 관전평이다.
우연은 필연의 가면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사람들은 <우연>이라 말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나는 우연이라 말하지 않아도 평안을 잃지 말기를 바라고 산다.
20년 후에 아이들이 오늘 포스팅을 읽었으면 좋겠다.
“얘들아 지금도 잘 살고 있지? 2043년 오늘 말이야”
*“Difficult is Wonderful”은 피레네 넘을 때 만난 미국 아저씨가 우리 아이들 격려하며 한 말이고, ”Simple is Greatful”은 내가 흉내내며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