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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답이 있다

2023.5.4(목)

by 박달나무 Sep 26. 2023

6년 전 일본 히로시마에 들렀을 때 시내 가장 중심가 백화점 9층은 서점인데, 우치다 타츠루 코너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다.(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우치다 타츠루는 일본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문필가이다. 나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모두 박동섭 선생의 덕이다. 


국내 출간된 번역서의 절반은 읽었고, 여러 번 만났으며, 그의 고베 집에도 방문했었고, 박동섭 선생과 수십 차례 공부모임을 진행했다(지금도 진행 중)


나는 우치다를 개념으로 먼저 만났고, 10여 년 동안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우치다 사상을 후체험하고 있다. 문득 문득 “이것이 우치다 선생이 말한 것이구나”하며 무릎을 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치다 사상을 한마디로 한다면(지극히 뇌피셜일 뿐)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의 (시간적으로) 뒤에 있다> 는 것이다.


살면서 갈수록 위의 표현이 옳다고 느낀다. 같은 뜻을 반대로 말하자면, <누군가의 뒤에 있다는 것을 모를 때 인간은 오류를 범한다>


이 말을 <온고지신>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전혀 방향이 다르다. 즉 언뜻 보수적 주장처럼 보이지만 매우 진보적이고 혁신적이다.


바로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말미에 활약한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사상을 우치다 특유의 해석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그냥 달력 그림이다그냥 달력 그림이다

순례길을 걸으며, 우치다를 통과한 레비나스 사상을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은 자신의 앞에 시간적으로 앞선 인물/사건/역사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이런 거다.


우리 아이들이 과거 집성촌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치면, 형제나 친인척은 물론 마을의 어른들과 형 누나들을 보면서 자란다. 따라서 자기의 가치관과 도덕관, 놀이문화, 집단에서의 자기 위치, 삶의 리추얼(상대에 따른 태도의 설정)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반면 우리 아이들은 핵가족의 맏이로서 부모,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가 없기에 <최초의 인간>으로 착각하고 자란다. 


(*그동안 나를 찾아온 아이의 90%가 맏이였다. 이건 유의미한 분포 편향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한다. 울거나 언성을 높이며 분노를 표현하는 것도 커뮤니케이션이다. 즉 상대가 있어야 가능하다. 나는 일부러 감정을 과하게 표출하는 아이를 혼자 있게 하고(가두지 않았다^^) 관찰했었다.(과거 기숙대안학교 시절) 혼자만의 공간에서 아이는 전혀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상대와 소통하면서 <룰은 내가 정한다>를 천명한 어린 궁예다. 조각난 잡다한 지식을 많이 알고(유튜브 덕이다) 천성이 예민하고 눈치가 빠르다. 눈치가 빠르다는 건 본능적으로 상대방 속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 


사실 아이들의 고통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늘 배척 받는 자아 때문에 불안하다. 



중세가 암흑기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가 강물처럼 흘렀다고 주장하는 글을 봤다. 충분히 이해된다.


스페인 작은 마을 지나며 기독교 문화가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렸는지 확인한다.


중세 사람들은 이미 정해진 계율에 순종했다. 자신이 선택할 삶의 가지는 없다. 봄의 따뜻한 기운을 받으면 이파리를 내밀고, 가을이 깊어지면 잎을 떨구는데 미련이 없다. 


하나님 때문에 태어났고, 하나님 곁으로 가는 길만이 있다. 살아있다면 주어진 범위에서 즐기면 된다. 즐겁게 하나님을 섬기면 영원한 영광의 길이 열리니 갈등하고 고민할 일이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 운운하는 시민사회에서 총알과 폭탄은 자비가 없다. 20세기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과연 언제가 더 암흑기인가. 우리 아이들이야말로 암흑기에 태어나 두려움 DNA가 새겨진 것은 아닌가. (지금 노인들도 예전엔 어린 아이였고 두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두려움에 떠는 불쌍한 이 아이들을 어쩔 것인가



16km만 걸었다. 어제 그제 무리했다. 몸도 힘들지만 정신적 스트레스가 크다. 그래서 조금 걷고 일찍 숙소에 들었다. 내일은 불금…. 주말이라 숙소가 없다. 예약이 불가능하다. 음…. 어찌 되겠지.



하늘이 파란 게 아니라 시퍼렇다. 대기 중 먼지가 전혀 없다. 땅은 드넓고 기름지다.


하지만 스페인이라고 기후위길 피할 수 없다. 과연 인류는 지속가능할까


30년 전에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 가서 경내를 산책하는 40대 중반 비구와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일행 중 누군가 비구승에게 중의 고기 섭취에 대해 물었다. 


“중도 고기 먹습니다. 저도 일부러 찾지 않지만 기회가 있다면 먹습니다. 수행에 에너지가 필요하니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매우 불편했다.


내가 도발적으로 물었다.(나는 채 30이 되기 전이었다)


“수행을 왜 합니까?”


“수행은 곧 시간죽이기입니다. 비구승은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가 시간을 보내는 것만 가능합니다”


대답을 듣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호감이 들었다.


지구에 사람 목숨으로 태어나 죽는 날까지 시간적 간극에서 의미있다는 건 <시간죽이기>뿐 아니겠는가.



당시 깨달음으로 줄곧 시간을 죽이며 지내고 있다.


어제 그제 무리하게 걸은 건 <걷기=시간죽이기> 공식을 위해 숙소에 도착하면 저녁 먹고 곧바로 잠에 빠지게 하려는 의도였지만, 어른들이 손들었다. 

이제부터 까스티야&레온 주에 들어선다이제부터 까스티야&레온 주에 들어선다

두 어른 모두 몸상태가 메롱이다.


당분간 운기조식하며 걷는 거리를 줄이려고 한다. 그런데 숙소에 일찍 들어가면 아이들 관리가 어렵다.


삶은 언제나 진퇴유곡이고, 모순적이며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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