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자유보다, 쉴 자격이 필요한 시대
“아빠, 나 학원 땡땡이쳐도 돼?”
회사에서 업무 중 제이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라면 학원 숙제를 안 했거나 물건을 깜빡했을 때나 오는 전화인데, 이번엔 뭔가 결연한 기색이었다.
“응? 왜...?”
“가기 싫어서...”
(속으로) 땡땡이를 물어보고 한다고?
“솔직히 아빠는 괜찮은데, 원장님께서 가만히 계실까?”
“에잇...”
전화를 끊은 아이는 군소리 없이 학원에 갔다. 예고 없이 그냥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수 있는 자유. 그건 아직 제이에겐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제이를 보며 문득 떠오른 한 문장이 있다.
연재 웹툰에서 종종 보게 되는 문구이다. 기다렸던 회차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실망감보다, ‘무슨 일 있겠지’ 하는 마음에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하지만 2주, 3주가 지나도 여전히 휴재면 슬슬 짜증이 올라온다. 대체 왜 쉬는 거지? 성의가 없는 건가? 소재 고갈인가?
영화나 드라마가 된 작품을 여럿 보유한 한 웹툰 작가의 사례가 생각난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정감 있는 그림으로 팬들 사이에서 신뢰를 쌓아오던 작가였지만, 휴재가 잦았던 시기가 있었다. 휴재가 반복되자 팬들의 불만도 커졌다. 댓글 창에는 “이럴 거면 그만 그려라”, “성의 없다”, “갑자기 퀄리티도 떨어졌다” 같은 말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무기한 휴재 공지가 올라왔다. 그리고 함께 밝혀진 사실은 작가의 아버지가 오랜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부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마친 후 가능한 한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잠시 기한을 정하지 않고 휴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보통 이쯤 되면 분위기가 숙연해지기 마련인데, 믿기 어렵게도 그 후에도 고인을 조롱하거나, 작가의 슬픔을 비하하는 악성 댓글이 계속 이어졌다.
“이걸 빌미로 영영 쉬려는 거냐.”
“장례 치르고도 그림 한 장 못 그리냐.”
“애초에 실력이 떨어졌던 거다.”
도대체 자신이 재미있게 보고 있던 작품의 작가가 겪는 슬픔 앞에서, 어떻게 이토록 무감각하고 잔인해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작품은 사랑하면서, 정작 그 작품을 만든 사람에겐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했다. (물론 작가를 응원하는 댓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악플은 더 쉽게 눈에 띄고, 더 날카롭다.)
쉴 자유가 아니라, 쉴 자격을 요구하는 사회. 공감은 없고, 설명만 요구하는 시대. 우리는 누군가의 ‘멈춤’에 대해 꼭 사유를 증명받아야만 이해할 준비를 한다. 나 역시 그런 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팟캐스트를 즐겨 듣던 시절, 내가 좋아하던 프로그램이 어느 날 갑자기 쉬었다. ‘내부 사정으로 이번 주 업로드는 쉽니다’라는 단 한 줄과 함께. 그때 나는 내 기분대로 생각했을 뿐이다. ‘요즘 별로 열정이 없는 것 같네.’ 그런데 다음 주에 올라온 편에서 오프닝 멘트는 이랬다.
“출연진 중 한 분이 수술을 받게 되어 급히 휴방했습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저 (공짜로) 즐기는 입장이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성급하게 불만을 가졌을까. 사정이 드러나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그 얄팍한 공감력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쉬어야 할 땐 쉬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쉬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특히 어떤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고 있는 사람들에겐 더욱 그렇다. 일본 만화 <중쇄를 찍자>를 보면 연재를 하는 만화가들이 받는 심리적 압박감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압박감은 생활을 정상적으로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 연재를 하는 창작자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래서 연재가 중단되는 사태가 찾아올 것을 대비, 편집자가 뒤로 여러 편을 미리 확보해 두는 장면에 대한 기억이 있다. <이번 주는 쉽니다>라는 문장 하나에 쏟아질 실망과 원망, 구독 취소, 악플… 그 모든 걸 감수하고서야 비로소 쉴 수 있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 휴재는, 회복이 아니라 도박인 것이다.
“그냥 가기 싫어서…”
“그냥 오늘은 쉬고 싶어서…”
땡땡이는 무산되었지만 우리 모두가 제이처럼 솔직히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꼭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감기, 장례, 수술, 접촉사고... 무엇이든 명분이 필요하다. 명분이 있다한들 비난과 질책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어쩌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멈추고 싶지만 멈추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럴 수 없어서. 쉴 수 있는 사정이 없어서. 그 사정을 납득시킬 누군가가 두려워서. 그리고 나 역시, 그중 하나다.
사실 이번 주, 꽤 무리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진심으로 휴재하고 싶었다. 물론 내가 글을 올리지 않는다고 악플이 달릴 일은 없다. 그냥 댓글 자체가 없으니…. 하지만, 결국 휴재를 주제로 글을 써버리고 말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글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므로.
그러니 이 글은,
그냥 휴재 실패 보고서라고 불러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