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씹만 남은 자리에서 배우는 것들
오랜 친구들과의 단톡방을 열어보았다. 무려 서른 명이나 있던 방인데, 최근 대화는 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얘들아, 날 더워지기 전에 등산 모임 한번 추진해 볼까?”
그 이후로는 누구도 답이 없다. (물론 나도 포함) 그나마 읽은 사람은 모두 읽씹. 읽지 않고 메시지 옆에 남아 있는 숫자도 10이나 된다.
예전엔 이 단톡방에 누군가 어디 놀러간 사진 한 장만 올려도 ‘와, 멋있다’, ‘어디야?’, ‘다음엔 나도 불러라’ 하며 반응이 쏟아졌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졌던 단톡방이 이제는 고요해졌다. 한때 유명세를 탔던 동네가 삽시간에 고요해져 버리는 현상과도 비슷하게. 이제는 누가 뭘 올려도 읽음만 남고, 대답은 씨가 말라간다. 조용히 흐려져가는 관계. 그래, 우리들의 관계가 이렇게 되는 건, 아쉽지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엔 대학 동아리 친구 단톡방에서 황당한 일도 있었다. 그날은 마침 한 친구의 생일이었다. 나는 단톡방에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다행히(?) 다른 친구들도 축하행렬에 몇 명 따라붙었다. “생일 축하해~”, “행복하자.” 생일 정도 되니까 그래도 몇 명은 반응하는구나 싶었는데 정작 당사자가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게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얼마 후에야 당사자와의 저녁 자리에서 알게 됐다. 정작 생일 당사자가 그 단톡방에 없다는 걸. 단톡방을 조용히 나가는 기능을 활용해서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해 친구들은 그 친구가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향해 축하를 보냈던 거다. 친구의 이야기는 그러했다. 무슨 말을 해도 반응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애쓰는 삶을 사는 건 무의미하다고. 이제는 그럴 만큼 한가하지 않게 되었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단톡방에 원래 더 많은 인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미 그 친구랑 비슷한 생각을 했던 친구 몇몇도 그 자리를 떠났던 것이다. ‘안녕’이란 말도 없이….
더 가관인 건, 그 친구가 단톡방을 나간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누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빠서 답을 못 하나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간 거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 친구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우린 그저 각자 점점 바쁘고, 자기 인생에 집중하는 삶을 사는 중이다. 한때 친했던 친구들이라 할지라도 점점 이런 조용한 관계 단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시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연락이 없다는 것, 그리고 거절이 반복된다는 건 더 이상 너와의 관계에 애쓰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처음에 받아들이기 좀 어렵지만 말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경험이 또 있었다. 첫 책 <아무래도 잘한 것 같아>를 냈을 때다. 출간 기념으로 책을 잔뜩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정성스럽게 사인도 하고, 간단한 감사 인사도 한 줄씩 적어 넣었다. 그걸 준비하던 나는 큰 행복을 느꼈다.
책을 받은 지인들 대부분은 정말 기분 좋은 반응을 보내 주었다. 잘 받았다고, 가장 먼저 읽어보겠다고, 출간을 축하한다고. 심지어 여러 인터넷 서점을 돌며 리뷰를 남긴 친구도 있었다. 꼭 그걸 바라진 않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런 반응들이 무척 고맙고 소중했다.
하지만 일부 지인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 반응도…. 책을 잘 받았는지, 읽었는지, 그냥 책장 한 켠에 꽂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보내기 전에 당연히 책을 받을 주소를 물어보고 보냈고, 배달이 완료된 사실도 꼼꼼하게 확인했지만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그야말로 연락두절, 카톡방의 ‘읽씹’ 현실판을 경험했던 것이다. 물론 ‘잘 받았는지?’, ‘읽어봤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마치 책을 빨리 읽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일까 봐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응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운한 감정은 약간의 허탈함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때 이후 깨달았다. 관계에 너무 애쓰며 살 필요가 없구나. 나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대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이 깨달음은 서운함을 조금 덜어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하게 되는 상대는 우리 집 중학생 제이이다. 얼마 전 제이가 늦은 밤 학원을 마치고 와서 내 침대에 걸터앉아 오열을 했다.
“아빠, 나 오늘 친구랑 싸웠어…”
사연을 들어보니 별것도 아니었다.(제이야 미안.) 누가 단톡방에서 자기 말만 무시하고 대답을 안 해줬다는 거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빠도 맨날 그런다.”
제이는 울상을 지은 채 ‘아빠는 공감부족이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제이에게 친구는 세상의 전부다. 친구가 무시하면 세상이 무너진다. 그런 딸에게 나는 어른의 관점을 가르쳐보려고 가끔 애써본다.
“있잖아, 살다 보면 집중해야 할 사람이 계속 바뀌어. 지금은 친구들이 전부인 것 같아도, 나중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경우도 많아. 가까운 사람이라는 게 시절마다 계속 바뀌기도 해. 시절 인연이란 말 들어봤나? 학교 친구든 직장 동료든 잠시 스쳐가는 인연인 경우가 많다는 거야. 결국 몇 안 되는 진짜 친구만 남게 돼. 그것도 행운이고. 친구가 많으면 좋을 것 같지? 근데 어른되면 그게 꼭 그렇지도 않다. 단톡방 10개 돌아가면서 ‘ㅋㅋ’ 찍어야 한다고 생각해 봐. 피곤하지?”
물론 아이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빠는 그냥 친구가 별로 없는 거잖아.”
나는 웃음을 참으며 속으로만 대답했다. 그래, 맞아. 나는 이제 점점 관계를 정리하고, 줄이고, 좁혀가는 중년 남성일뿐이다. (아닌 척해도, 가끔씩 조금 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데 이상하게도, 외로움만 있는 건 아니다. 관계를 줄이고 나니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 예전엔 카톡 알림만 울려도 의무감처럼 답장을 해야 했고, 지인의 부담스러운 부탁에 억지로 대응해야 할 때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창을 정리했고, 이제는 알림이 조용하다. 마음도 조용하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중 하나가 글쓰기다. 예전엔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썼다면, 이제는 온전히 나를 위해 쓰고 있다. 글쓰기도 관계와 비슷하다. 꾸준히 쓰지 않으면 독자는 떠난다. 마찬가지로 꾸준히 안부를 묻지 않으면 친구도 멀어진다. 글쓰기는 그렇게 보면 나에게 보내는 안부인사와도 같다. 나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내가 지키는 일상의 약속과도 같다. 어떤 관계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둘 중 하나는 꽤 큰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기에, 나는 나와의 약속을 꾸준히 지켜 나가고 싶다.
가끔은 이렇게 생각한다. 중년의 삶은 관계를 비우는 연습일지도 몰라. 남는 건 몇 명 안 되지만, 그게 진짜 내 사람들이다. 그걸 깨닫고 나니 단톡방의 침묵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서운하지 않다.
그러던 중 최근 뜻밖의 일이 있었다. 평소 거의 연락하지 않던 옛 부서 선배가 내 책을 읽었다며 말을 걸어왔다.
“지훈아, 잘 지내지? 우연히 현우에게 듣고 알게 돼서 네가 쓴 책 읽었어. 글을 쓸 줄 몰랐네. 재미있게 잘 읽었다고.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해서 그런지 공감이 되더라. 다음 책도 기대할게.”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에게서 온 진심 어린 격려였다. 그때 깨달았다. 관계는 사라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는 걸. 중년의 관계란, 잃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새롭게 발견하는 것도 있구나. 평생 갈 것 같은 인연은 갑자기 정전이 된 것처럼 단절되고, 내가 크게 노력하지 않았던 관계에서 뜻밖의 의미를 찾게 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역시 중년이 될수록 삶의 아이러니가 늘어간다.
갱년기 중년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작은 조언은 이것뿐이다. 너무 애쓰지 말되, 그렇다고 너무 무심하지도 말자. 대신 가끔은 먼저 웃어주자. 그 웃음 하나로도, 남아 있는 관계는 의외로 오래간다.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