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아니까

적당한 착각, 생존의 기술

by 신지훈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오래 여운을 남긴 장면이 있다.


구씨와 염미정의 '추앙 로맨스'도,

염기정과 조태훈의 늦은 연애도 아니다.


염미정이 후배 보람과 밥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

신규 카드 디자인을 고르던 실장님 이야기였다.


(실장) "왠지 이거라는 느낌이 오네."

이 말과 함께 '나 좀 있어 보이네' 하는 표정으로 간단히 의사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정과 보람의 대사.


(보람) "그렇게 오래 고민하더니 결국 한 사람의 느낌인 거야?"

(미정) "나는 처음부터 그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렇게 말했으면 그랬을까?"

(보람) "성과를 내본 분들의 말은 진리니까. 우린 성과를 내본 적 없고."

(미정) "그분이 그렇게 말하는데 고맙더라.

뭔가 나랑은 차원이 다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냥 느낌으로 가는 거였어."

(보람) "언니는, 언니가 잘났다는 걸 몰라서 불행한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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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나의 해방일지 대본집)


그 장면이 오래 남은 이유는 단순했다.

나도 그렇게 안도한 적이 있으니까.




직장에서는 흔히, 임원이 내리는 결정은 깊은 통찰과 오랜 고민의 결과라고 믿는다.

혼자 해내지 못했을 땐 밤새 보고서를 고치는 실무진이 있을 거라 상상한다.


그 믿음은 일종의 확증편향이다.

결과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실패를 합리화해 준다.


거기에 '성과'가 얹히면 금세 신앙이 된다.

그렇지 않고 대충 결정했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배신감을 느끼니까.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느낌이 오니까'라는 말 한마디로 끝나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 사실을 알면,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삶은 대체로 계산이 아니라 감으로 굴러간다.

결국 우리는 생각보다 허술한 시스템 안에서,

그 시스템이 나를 대신해 주길 기대하며,

성실하게 착각하며 살아온 셈이다.


예를 들어, 투자에 성공한 사람들이

정말로 엄청난 분석 끝에 그 결과를 낸 걸까?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운이 좋았던 사람들도 많다.

그걸 인정하기가 어려우니,

이런 말이 생겼을 것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운 좋은 놈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엉성한 논리 같지만, 현실에서는 자주 목격된다.

그럴 때마다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대부분은 착각 위에서 흘러왔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 알아줄 거라 믿었다.

진심은 결국 통한다는 말도 믿었다.


착하게 살면 좋은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알았고,

회사에서 실력만 있으면 인정받을 줄 알았다.


결혼하면 외롭지 않을 줄 알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나의 기대보다 한 뼘쯤 비껴가 있었다.


진심은 때로 불편함이 되고,

착함은 이용당하기 쉬운 성질이었으며,

실력은 '누구나 인정할만한 성과'라는 기준 앞에서 무력했다.


시간도 다르지 않다.


서두르면 따라잡을 줄 알았는데,

서두르는 동안 시간이 앞질러간다.




쫓고 쫓기다 보면 어느새 나이 오십이 코앞이다.


예전엔 '인생은 길다'고 믿었는데,

요즘은 '길긴 한데 생각보다 짧다'는 걸 안다.

어른인 척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안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

착각이야말로 인간의 생존 스킬 아닐까.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하기엔 세상이 너무 불안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아닌지.


괜찮다고, 아직 가능하다고,

다음엔 더 잘할 수 있다고.


그 거짓말이 없으면 하루를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쩌면 삶은 거대한 사기극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계획이 있는 척하고,

누군가는 알고 있는 척하며,

누군가는 아무 일 없는 척 살아간다.


우리 모두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배우처럼,

진심과 거짓 사이를 오가며 대사를 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누구는 자신의 대본을 믿고,

누구는 대본이 없다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얼마 전 회의에서였다.

누군가 내 의견을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 몇 년간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각해 보면,

이 방향이 좀 더 전략적인 것 같습니다."


그냥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특별한 근거 제시 없이' 말했을 뿐인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또 누군가의 착각이 되어 있었다.


나는 오늘도 적당히 착각하고,

적당히 진지한 얼굴로,

"이게 낫지 않나요?"라 말하며 하루를 산다.

누군가에게 착각을 안기면서...


이유는 간단하다.

나도 느낌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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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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