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나지 않는 바지를 사고 싶어

이 바지를 입고 있으면 하루 종일 눈물이 나

by 아도르
나는야 빅사이즈

결국 '빅사이즈'라는 네 글자를 검색창에 또박또박 입력했다. 최근 구입한 옷들의 사이즈가 작아 소비를 해놓고 스트레스를 얻고 있었다. '통통'의 끝에서 선을 넘을 듯 말 듯 살아온 나였다.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갱신하고도 빅사이즈를 검색하지 않은 것은 내가 생각하는 빅사이즈와 세상이 재는 빅사이즈가 달랐기 때문이다.


가을이 깊어졌고 겨울이 온다. 부쩍 추워진 아침, 옷장을 열다 말고 눈물이 났다. 살이 찌고 더 이상 기성 사이즈에 쫄리지 말자고 마음먹은 이후로는 넉넉한 사이즈의 옷만 샀는데, 겨울은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존에 있던 겨울 바지에 기어이 두 다리를 넣어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쫄리는 사이즈에 두 다리를 욱여넣고 버클로 뱃살을 졸라맨 채로 사무실에 앉아 9시간 동안이나 웃어 보일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미처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죄로 숨 쉴 때마다 울컥울컥 눈물 나는 바지에 두 다리를 욱여넣고 출근을 했다. 가슴이 떨렸다. "빨리 큰 바지를 사야 한다, 내일 아침에도 옷장을 열면 눈물이 날 것 같으니까"라는 생각에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쇼핑을 했다. 빅사이즈 쇼핑몰에서도 내 바지 사이즈는 '엑스라지'였다. 오로지 '사이즈'에 맞춰 빨리 옷을 사야 하는 상황에 놓여진 내가 너무 싫어 또 눈물이 났다. 나도 예쁜 바지를 입고 싶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 예쁜 바지의 두 구멍에 내 다리를 넣을 수 없겠지. 예쁜 바지들은 대부분 옹졸하다. S와 M이라 구분되는 사람에게만 착용을 허용하니까.


기성복을 고를 때도 늘 내 기준은 '날씬해 보일 것'과 '내 사이즈가 있을까'였다. 다른 사람들의 "별로 안 뚱뚱해 보이는데"라는 말 따윈 위로가 되지 않았다. 가끔 라지 사이즈가 맞기라도 하는 날엔 기분이 좋았다. 살이 빠지지 않은 걸 알지만 모르는 것처럼 기뻐하며 흔쾌히 비싼 바지를 사곤 했다. 그렇게 어렵게 고른 바지가 이제 나를 눈물 나게 한다. 바지가 내 배를 꽉 움켜쥐고 살 고문을 하는 기분으로 하루 종일을 버티다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된다. 단 몇 분이라도 그 기분을 다시 느끼기가 싫었다.


눈물 나지 않는 바지를 사고 싶어


비교적 사이즈가 다양한 브랜드의 바지 중 제일 큰 사이즈의 바지를 샀다. 그 바지조차 내 배를 움켜쥐자 거울 속에 보이는 내가 한없이 초라했다. 남들은 모를 인생의 고군분투를 살 때문에 하는 게 자존심 상했다. 나는 동생에게 톡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숨 쉴 때마다 울컥해, 눈물 나지 않는 바지를 사고 싶어"


스트레스를 받으니 이유 없이 살이 찐다고 울컥해하던 내게 늘 콧방귀만 뀌던 동생은 나의 간절한 한마디에 그제야 조금 나의 간절함을 알 것 같다고 했다. 살이 찌는 이유가 단순하게 "많이 먹어서"라거나 "관리를 안 해서"라면 빼는 것도 쉽겠지. 다이어트에는 수많은 정신적, 물질적 의지가 따른다.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뜻이다. 굶으면 빠지지만 평생 굶으며 살 순 없지 않은가. 다이어트를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순 없는 시기이기에 일단은 눈물 나지 않는 바지를 새로 사기로 한다. 바지 주제에 나를 울컥하게 하다니, 나를 울컥하게 하는 바지는 이제 포기하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재단하는 모든 숫자에 코웃음 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을 재단하는 숫자'란 SNS의 좋아요 수, 구독자 수, 조회 수, 내 몸을 재는 사이즈, 판매부수, 성적, 재산 지표 등 우리 삶 전반을 편리하게 구분 지어주는 모든 숫자들을 말한다. 숫자 하나에 울고 웃지는 말자고, 무엇을 판단하는 숫자에 초연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한 것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겠다는 말이었다.


이제 다시는 옷장을 열며 울지 않으리.


아니 근데, 라지 사이즈는 언제부터 이렇게 작아진 거지? 시대의 흐름을 아우르지 않는 올드한 라지 사이즈에 굴복하지 말자고 외로운 다짐을 해본다.




쓰는 아도르

사진, 글, 캘리그라피 ad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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