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근쥬스 Sep 22. 2020

임신 준비 중이라는 어정쩡한 단계의 사람

우리나라 직장 여성들에게 임신 준비 중이라는 위치는 굉장히 불리하다. 임신을 준비하고 있다고 회사에 말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결혼을 하고 나면 인사치레로 아이는 언제 가질 것이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오지만 막상 그 사람이 아이를 가질 계획이라고 하면 회사는 아무래도 그 직원에게 힘든 일을 지시할 수 없고 원거리 출장을 보낼 수 없으며 장기적으로 오랜 기간 이어지는 프로젝트에 투입시키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이 임신을 하게 되면 이후 발생할 일부 공백에 대해 회사는 대비를 해야 한다.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본인의 커리어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임신 준비 사실을 숨기고 임신을 한 사실조차 숨기다가 초기 유산을 경험하는 케이스가 참 많다. 회사에서도 임신인 것을 밝히지 않고 급한 일정 때문에 해외 출장을 갔다가 유산한 직원들을 몇몇 봤다.


게다가 회식이라도 잡히면 큰일이다. 임신 준비 중인 상황에서, 특히나 배란일 이후 소식을 기다리는 상황이라면 더욱 난감하다. 회식 자리를 모조리 다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중요한 거래처 미팅이라도 있는 상황이라면 술 한두 잔 안 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때마다 '전 임신 준비 중이라 술 못 마십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여성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초반 6개월 정도는 임신 준비 사실을 숨겼다가 장기 출장 건이 터지면서 회사에 임신 계획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출장은 다른 직원이 대신 가게 되었고, 그 달 역시 나는 임신에 실패했었다. 어찌나 민망하던지. 그냥 아무 소리 말고 출장을 갔었으면 됐을 텐데. 회사는 나의 임신 준비 사실을 알았고 그 이후 몸살이 난 것 같다 하면 임신인 거 아니야? 피곤해 보이면 임신인 거 아니야? 감기에 걸리면 임신인 것 아니야? 등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나의 임신 실패 기간이 길어지자 회사 사람들은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고 나는 그 상황이 참 불편했으며 빨리 '나 임신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계속된 임신 실패로 인해 계속 임신 준비 중 상태가 지속되면 회사도 사람도 지치게 되는 것이다.




임신을 준비하는 중이라는 상태는 여성이 언제고 임신 판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조심해야 하는 상태가 지속된다.


처음 6개월 정도는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다. 주위에 술을 신나게 퍼마시고 임신해서 아이 잘 낳은 사람들의 케이스를 많이 봤으니까. 임신인 줄 모르고 배낚시에 갔다가 바다에 빠져서 죽다 살아난 지인도 있었다. 물론 아이는 건강히 잘 나왔다. 그리고 나는 아이가 바로 생길 것이라는 근자감도 있었고. 아, 근자감은 아닐 것이다. 나는 주기가 굉장히 규칙적인 사람이니깐. 세상이 무너져도 내 생리주기는 칼 같았다.


하지만 반복되는 임신 실패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임신이 되지 않지?라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내 생활 사이클은 임신에 모든 것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배란일부터 다음 생리 시작일을 기다리는 14일의 시간 동안은 정말이지 지옥이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남편과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뜨겁고 애틋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 임신 실패 기간이 길어지자 남편의 터치에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고 '나 오늘 배란일이야. 약속 잡지 말고 집에 일찍 와'라는 카톡을 보내며 심한 자괴감에 시달렸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의 부부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지 정말이지 기분이 끔찍했다. 남편은 내가 관계 후 물구나무라도 설까 봐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불편하게 마치 할당된 업무를 쳐내듯이 숙제를 하고 나면 기다리는 2주의 시간 동안 혹시나 배탈이 나도 그 대기 기간엔 내가 즐겨먹던 정로환을 먹을 수 없었고 환절기 알레르기가 심해서 콧물이 줄줄 나더라도 알레르기 약을 섣불리 먹을 수 없었다. 생리 예정일이 다가오면 '임신 증상과 생리 전 증상이 비슷하다던데' 라며 온갖 증상 놀이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칼같이 생리가 시작되면 그 대기 기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폭음을 했다.


사람들은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살다가 임신이 확인되면 그때부터 조심하면 된다고 했지만 매달 임신 실패를 맛보는 나에게 그런 조언이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남들은 술을 퍼마신 다음날 임신인걸 알았다거나 감기가 심해서 약을 마구 먹었는데 그 후에 임신인걸 알았지만 애는 건강하게 잘 나왔다 등의 이야기를 했으나 그게 내 이야기가 되게 할 순 없었다. 그들이 술을 퍼마시고 감기약을 먹고 아이를 낳았던 젊었던 나이와 달리 난 이미 노산이고 계속된 임신 실패로 그런 행동들이 나의 임신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 무서웠다. 혹여나 내가 모르고 먹은 약과 술들이 기형아라도 유발하는 원인이 되면 어쩌나.


그렇게 불안은 나를 잠식해 나갔다.




임신 준비 중이라는 경계 단계에 있을 때나 시험관 시술을 하고 있는 지금이나 '마음을 편히 가지면 알아서 생긴다'라는 조언을 참 많이 듣는다. 또는 내려놓으면 애가 생긴다든가.


그런데 이 말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정말 폭력적인 말이라는 것을 정작 그 멘트를 하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바보 천치라서 마음을 편히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저런 쉬운 한마디로 나를 조바심내고 달달 볶는 신경과민증 환자로 만들어 버리다니. 본인들은 정작 자기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 때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되던가? 그렇게 상황이 쉽게 내려놔지나? 아니 그리고 오만가지 책들에서는 열렬히 구하고 간절히 원해야 이루어진다며. 이건 내려놓음의 정 반대인데?


저 말을 듣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마음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조급증과 불안증을 장착해서 애를 못 갖는 사람인가 보다. 내가 스크류바처럼 속이 꼬였다고 생각해도 할 수 없다. 진짜로 그런 생각이 든 적이 많았으니.


난임 카페에 맘 편히 가지라는 말 듣기 싫어 죽겠다는 글이 올라오면 공감한다는 댓글이 폭주를 한다. 난임인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은 말이 '포기하면 생긴다' 일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쉽게 포기가 안되기 때문에.

포기를 했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들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노력하고 진짜로 지쳐 나가떨어졌다는 것이다. 신이 있다면 정말 욕하고 따지고 싶다. 그렇게 당신의 자녀라는 사람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여서 대체 얻는 게 뭐냐고. (난 무신론자다. 고난 속의 성숙이라는 종교적 이야기는 택도 없는 개소리인 것 같다. 사랑한다면 행복을 줘야지 왜 괴롭히는 것인가)




많은 난임 부부들이 임신 준비 중이라는 어정쩡한 단계를 빠르게 지나 임신 중 - 출산 중 - 육아 중이라는 단계로 넘어가기를 바란다. 그런데 난임 병원 대기실에 앉아 나를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 작은 소원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나 역시 괴롭고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는 중이고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갑갑한 터널 속을 계속 헤매고 있다. 누가 이 깜깜한 터널은 언제 끝난다고 말이라도 해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을 텐데 그 누구도 이쯤 하면 됐다 라고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들 절박한 마음으로 난임 병원을 찾게 된다. 여기서는 내 터널의 끝을 찾아줄까 싶어서.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난임 병원에서 터널을 빠져나오게 된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난임 병원에서도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있다.


딩크 부부로 6년을 살 만큼 아이에 대한 욕망이 크지 않았던 내가 난임을 겪으며 느낀 심적 고통이 이 정도인데, 간절하게 아이를 원하는 난임부부들의 고통은 차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뉴스에 아이를 유기하는 어린 산모들의 이야기나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의 이야기가 나오면(얼마 전 라면 끓이다 불나서 의식불명인 두 형제 이야기 같은) 나오면 믿지도 않는 신을 욕한다. 저런 곳에 생길 생명을 난임부부에게 주면 어디 덧나냐며. 물론 내가 기똥차게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내리란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저렇게 피워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가게 두진 않을 텐데.


오늘도 나는 임신 준비 중에서 임신 중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조바심을 내고 불안해하며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내가 마음을 편히 먹지 않아도, 내려놓지 않아도 언젠가는 이 터널에서 웃으며 빠져나오겠지.




이전 03화 난임 판정의 시작, 나팔관 조영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