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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Dec 06. 2024

눈과 함께 쌓이는 것


11월이 끝나기 직전, 한국에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눈이 쏟아져 내렸다. 단 하루 만에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였다. 창문 밖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눈 밭에 구르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었다. 



요즘 어때요?

안부를 묻는 연락이었다. 출퇴근 없는 작가가 된 후 이런 날 나의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 또한 바뀌었다. 연락 온 이는 친구도, 직장 동료도, 지인도 아닌 첫 작품을 함께 작업 한 편집장님이었다. 


원래 알던 사이였지만 평소 결이 잘 맞아 공사 구분 없이 서로 격 없이 지내고 있다. 이제는 서로의 안부를 주기적으로 묻는 사이가 되었고 나는 그녀를 때로는 편집장으로 때로는 친한 언니로 그리고 가끔은 인생 선배로 호출을 한다. 안부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작품, 사람, 사랑, 인생 그리고 가끔 고양이 이야기까지 선 없이 넘나 든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그녀와의 안부를 가장한 수다 시간은 많은 시너지를 불러일으킨다.


기본적으로 작가의 삶은 작품에 영향이 매우 크다. 결국 글이란 그 작가의 생각이자 가치관이며 태도가 담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가 평소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고민과 문제를 안고 있는지에 따라 글에 흔적들이 묻어난다. 


그래서 쓰고 있는 작품에 다른 흔적들이 묻어나지 않으려면 평소 몸과 마음의 관리가 중요하다. 한 번은 이성 문제로 골치가 아파 써야 할 글에 집중이 안된 적이 있다. 온통 내 생각이 이성 문제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결국, 난 곧바로 그녀를 호출했고 진지하고도 사적인 대화를 한 시간 넘게 하면서 그녀의 현실적인 조언과 위로를 받자 머릿속이 깨끗하게 청소됨을 경험했다. 


"지혜작가님, 이제 다시 글에 집중하세요!"

우리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그녀와의 사적 대화를 통해 난 다시 집필에 집중할 수 있는 원동력과 마음 청소가 가능했던 것이다. 난 이처럼 작품 외에도 몸과 마음의 정돈이 필요할 때 그녀를 수시로 찾아간다. 


이쯤 되면, 시도 때도 없이 푸념만 늘어놓는 작가가 귀찮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그녀는 이런 관계를 조금은 즐기는 듯하다.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다) 어딘가에서 읽은 적 있는데 편집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편집능력보다도 작가와 작품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했다. 그녀는 작가라는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관심이 많고 쓰레기통에 들어갈 습작글 따위도 친절하고 즐겁게 피드백해주는 훌륭한 편집자다. (그러니 그녀는 합격이다) 


그런 훌륭한 편집자를 곁에 둔 덕분에 징징대면서도 매일 글을 써내고 있다. 이번 겨울은 눈이 꽤 많이 올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누가 그랬더라) 지난밤, 소복하게 쌓여가는 눈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의 폴더 안에도 글은 쌓이고 있어. 아직 쓰레기통 안 비웠거든'


이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눈은 치워지고 녹아내리겠지만 나의 폴더는 여전히 차곡차곡 쌓여있다. 비록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하는 글들이지만 언젠가는 쓰임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폴더만큼은 열심히 쌓아두고 있다. (비록, 쓸모가 없어진 글이더라도) 



올해 겨울, 다시 소복하게 쌓일 눈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안부를 물을 것이고 난 쌓아 놓은 폴더를 꺼내들 것이다.

할 이야기가 무수히 많아지는 겨울이 즐겁다. 무엇으로든 빼곡하게 채워질 연말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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