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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May 17. 2016

영화 <곡성>이 빚는 황홀경

믿음과 의심이 만들어 낸 엑스터시


이 글은 영화 <곡성>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황홀경이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이 관객들을 홀리고 있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라는 사뭇 비장한 감독의 전언은 이래도 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는 호기로운 선언과 다름없었다. 제목 그대로 곡소리 나는 영화이다.



 영화는 곡성이라는 외진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다룬다. 사건의 전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나가고, 정신을 잃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도한다.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마치 한 편의 추리물을 보듯, 감독이 빚어낸 맥거핀 앞에서 의심과 믿음을 반복한다. 그러나 의심의 고삐를 늦추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한계에 이르러 자가당착 할 수밖에 없게끔 영화는 인도한다. TV나 신문은 곡성 마을의 사건을 환각 버섯이 불러일으킨 해프닝으로 보도한다.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이라면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이성적 추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매체의 보도는 영화 속 사건의 진실로부터 가장 거리가 멀다. 독버섯 때문이라는 검사 결과를 믿어 의심치 않던 주인공 종구는 몇 번의 주관적 체험으로 단숨에 '버섯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며 의심의 맹신론자가 된다.

 의심 없는 믿음을 업으로 삼는 사제는 어떠한가. 어찌 보이지도 않는 것을 그리 쉽게 믿느냐는 사제의 나무람은 제 존재 자체를 자승자박 하는 꼴이다. 부제로 있던 이삼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실을 알기 위해 외지인이 숨어든 동굴까지 찾아온 그는 '지금이라도 당신이 정체를 밝힌다면, 그 말을 믿겠다'며 가냘픈 믿음의 뿌리를 여실히 드러낸다. 외지인은 이내 악마의 모습으로 분해 신의 성흔을 조롱하듯 흉내 내며 알량한 믿음의 실체를 뒤집어 흔든다. 나침반은 고장 났고, 사람들은 방향을 잃는다.


미끼를 물었다.

 이렇듯 영화 <곡성>은 믿음과 의심의 영화이다. 극장을 떠나는 사람들은 제 추리에 미련이 남았는지 본인이 내놓은 답안지를 앞다투어 남과 비교하고 정답을 밝히려 한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는 영화 속 메시지처럼 이는 실로 무용한 일이다. 종구가 본 빨간 눈의 사나이가 꿈인지, 현실인지 설명하지 않는 순간부터 이미 영화는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로 범람한다. 우리는 언제나 행동 이전에 이유를 찾고,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애를 쓰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무엇이 딸려 올지 모르고 던져진 찌 앞에서 우리는 그저 '미끼를 문' 것일 뿐이다. 현상이 우선하고 판단이 따른다는 일반적 상식은 곡성이 보여주는 초자연적 사태 앞에서 무참히 전복된다. 판단이 선행하고 현상이 뒤따른다. 이 난해한 역학을 통해 곡성은 무섭도록 슬픈 황홀경의 지경에 관객들을 데려다 놓는다.



 나홍진 감독이 직접 밝혔듯, 영화 <곡성>은 피해자를 위한 영화이다. 왜 자기여야 하냐는, 왜 우리 딸이어야 하냐는 종구의 울부짖음에 무명은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고 죽이려 든 죄'라고 대답한다. '그건 우리 딸이 아파서, 먼저 화를 입어서'라는 종구의 항변에 무명은 침묵한다. 현상보다 선행하는 것이 인간의 판단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의심의 맹신론자가 되어버린 종구 앞에서 신은 너무도 무력하다. 갈림길 위에서 방황하는 종구의 모습은 불가해한 세상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듯 싶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처연한 광경에 나는 한없이 슬퍼만 갔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피해자의 운명을 살아간다.

 무력한 가장의 자화상으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는 실로 염세주의적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을 구하기 위한 아버지의 고군분투를 우리는 숨 가쁘게 따르며 지켜보았다. 이것을 어찌 비난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사안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살아감의 가치'를 폄하할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적 현상 앞에서 무능한 아비임에도, 종구는 한 집안의 아버지로서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삶은 언제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내 삶의 주인이 나 자신임을 역설할수록 우리는 본인의 무능함에 더 깊이 좌절하고 더 멀리 방황한다. 그러나 때때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헌신적 사랑이나 맹목적 믿음과 같은 실로 초자연적인 현상을 발견하기도 한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이 문제적 영화의 등장에 사람들은 동요하고 갑론을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어찌할 수 없이 흔들리는 인간이 있고 그럼에도 애써 살아가는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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