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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휘 Oct 07. 2024

연재소설_15화 맞아요. 이게 다 인간 때문이에요.

금세 용추빌라에 도착한다. 빌라 입구에서 민준은 어린애를 가르치듯 영이에게 검지를 들어 보인다.


“안으로는 절대 들어오지 마. 만약 내가 문밖으로 나왔는데 우리 아버지가 따라 나오면, 그땐 이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도망쳐. 알겠지? 절대 안으로는 들어오면 안 돼.”


다시 한번 영이를 단속하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쾅, 하고 문이 닫히자 안방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너 이리 와 봐라.”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안방 앞으로 가자 문지방에 말라붙은 핏방울이 보인다. 분명히 일은 벌어졌다. 민준은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안으로 들어간다.


아버지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민준은 그 앞에 가서 선다.


“인간을 도와? 우리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잊은 거냐?”


아버지가 질책한다. 눈동자엔 분노가 가득하다.


아니, 잊지 않았다. 민준이 이렇게 사는 건 모두 인간 때문이다. 잘 살고 있던 루마니아에서 도망치게 된 것도, 엄마가 피를 토하며 죽은 것도 그렇다. 일련의 사건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맞아요. 이게 다 인간 때문이에요.”


“그래, 아들아. 이리 와라.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야. 위대한 뱀파이어의 먹이일 뿐이라고!”


아버지의 눈이 번득인다. 그러더니 이내 그윽해진 눈빛으로 민준을 응시한다. 민준은 피하지 않고 그 시선에 맞선다.


“하지만,”

민준은 이를 악문다.


“죽어 마땅한 존재란 없어요.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에요. 뱀파이어도 뱀파이어일 뿐이고요.”


민준을 불행하게 만든 것도 인간이지만, 민준을 행복하게 만든 것도 인간이다. 특정 종족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어떻게 지내는가의 문제다. 영이 덕분에 알게 됐다.


“뭐? 너 지금 아버지 말에 토 다는 거냐?”


아버지가 벌떡 일어선다. 술에 절여져서 쪼그라들었던 근육이 팽팽하게 붙어 있다. 아버지가 몇 걸음 걸어오더니 민준을 위협적으로 내려다본다.


“다시 말해봐라.”


아버지가 민준의 턱을 움켜쥔다. 엄청난 악력에 턱이 바스러질 것 같다.


“다시 한번 지껄여 보라고!”


고함과 함께 민준을 내팽개친다. 민준은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바닥에 뒹군다. 가만히 서 있던 아버지가 꽃향기를 맡는 것처럼 숨을 깊게 들이쉰다. 향의 흔적을 찾다가 시선이 현관문을 향한다.


“저 아이 때문이구나.”


안 돼! 민준은 공포에 찬 눈으로 현관문을 바라본다.


“저 꼬맹이가 너를 망쳤어.”


아버지가 안방에서 걸어 나간다. 민준은 바닥을 기면서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


“안 돼요.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먹이를 구해올게요. 예전처럼 매달 구해올게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큰일이야. 엄마를 닮아서 마음이 약해 빠졌어. 인간에게 속아서 죽은 엄마의 죽음을 똑똑히 기억해라. 그런 인간을 좋다고 쫓아다니지 말란 말이다! 인간은 너를 망칠 거야. 예전에 데리고 온 애도 아빠가 먹어 치우지 않았으면 지금쯤 너는 걔 뒤꽁무니나 쫓아다니고 있을 거다.”


뭐? 알고 있었어?


민준의 손에서 아버지의 바지 밑단이 스르륵 빠져나간다.


학교에서 만두의 빈자리를 볼 때면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민준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자기를 설득해야 했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고. 


자기는 아버지가 엄청나게 굶주린 것도 모르고 만두를 집에 데려왔다. 아버지는 만두가 민준에게 소중한 사람인 걸 모르고 먹어버렸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인간과 어울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실수가 아니었다.


“이 개자식아!”


민준이 소주병을 들어 아버지의 머리를 향해 휘두른다. 유리병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병 조각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진다. 아버지가 얼굴을 막은 팔을 내리고는 소매를 슥슥 턴다. 전혀 타격이 없는 듯 얼굴에 조소가 가득 담겨 있다.


“어리석은 새끼!”


아버지가 민준의 복부를 걷어찬다. 민준은 배를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진다.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에 신음이 터져 나온다. 아버지가 다가와 민준의 멱살을 잡고 집어던진다. 민준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현관문에 부딪힌다. 두개골이 깨질 듯한 충격이 뒤통수에 전해진다.


“민준아! 괜찮아?”


현관문이 열린다. 영이가 들어온다. 은 십자가를 인형처럼 품에 꼭 안고 있다. 민준은 바들바들 떨리는 눈을 질끈 감는다. 빨리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몸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 때문에 엑엑 거리는 괴성만 나온다. 아버지가 은 십자가를 보더니 움찔한다. 하지만 태연한 척 서늘한 미소를 짓는다.


“먹이가 제 발로 걸어왔군.”

“전 당신의 먹이가 아니에요!”


영이가 용감하게 소리친다.


“이상하군. 민준이가 너를 먹이로 점찍었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과장된 손짓으로 턱을 쓰다듬는다.


아 제발. 민준은 제 몸이 아버지에게 이리저리 차일 때보다 더 큰 절망에 빠진다. 영이에게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그것도 악마 같은 아버지의 입으로 밝히고 싶지 않다.


“민준이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민준이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가 비아냥거리며 영이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 그러고는 기가 찬다는 듯이 웃는다.


“개가 똥을 끊지. 뱀파이어는 그럴 수 없어요.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마신다고. 어떻게 마시는지 보여줄까?”


아버지가 한 걸음 다가선다. 민준은 욱신거리는 상체를 들고 양팔을 뻗어 길목을 막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비웃음을 살 뿐이다.


“더 다가오지 마세요!”


영이가 십자가를 머리 위로 치켜든다. 십자가 때문에 민준의 어깨가 타들어 갈 듯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더 다가오지 않는 걸 보고 이를 악물어 통증을 참는다. 영이를 보호할 수 있다면 이깟 고통은 몇 번이고 참을 수 있다.


“뱀파이어는 자신의 공간으로 초대한 인간만 사냥할 수 있다고 책에서 봤어요. 난 아저씨를 초대한 적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영이가 말한다. 그러자 아버지가 책을 읽는 것처럼 무심하게 대꾸한다.


“단,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가족 간의 먹이 공유는 허용한다. 뒷부분은 안 읽었나 봐?”


“경찰에 신고했어요!”


영이가 발악하듯 소리치자 아버지가 검지만 편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젓는다.


“여기 오면서 CCTV 봤어? 이 동네에는 없어. 지나다니는 사람은 있든? 오, 저런. 비가 많이 오는군. 그러니 아무도 없었겠지. 그 말은 너 하나쯤 여기서 사라진다고 해도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이 겁 없는 부잣집 아가씨야. 온 사방에서 너를 지켜주는 그런 동네랑 여긴 다르단 말이다.”


아버지가 폴짝 뛰더니 벽에 달라붙는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움직여 천장까지 기어오른다. 그러고는 맹수처럼 빠른 속도로 영이에게 달려간다. 영이가 아무리 십자가를 들이밀어도 아버지를 막을 수 없다. 아버지가 폴짝 뛰어 영이의 머리 위로 달려든다. 민준은 팔을 뻗어 영이를 안으려 한다.


“꺅!”


영이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무게가 민준의 머리를 덮친다. 민준은 무게를 못 이기고 풀썩 쓰러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민준이 눈을 뜬다. 고개를 들자 머리카락에서 잿가루가 바스스 떨어진다. 다급하게 좌우를 살핀다. 영이가 민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다. 


두 팔로 민준의 종아리를 꼭 껴안은 채. 온몸은 재로 덮여 있다. 민준은 떨리는 마음으로 영이의 머리카락을 치우고 목을 좌우로 살핀다. 깨끗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터트린다.


민준은 영이의 몸에 묻은 재를 턴다. 흙에서 발굴된 유적처럼 하얀 얼굴이 드러난다. 거기에 제 볼을 대어 본다. 영이의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으……응.”


영이가 꿈을 꾸는 듯 뭐라 중얼거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본다. 꿈까지는 제가 어쩔 수 없는 게 아쉽다. 그저 악몽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빈다.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경찰에 신고했다던 영이의 말이 생각난다. 서둘러 영이를 깨운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운 영이가 잠이 덜 깬 듯 멍하니 앉아 있다. 그때 누군가가 쿵쿵 문을 두드린다.


“계십니까? 경찰입니다.”


영이가 두 눈을 번쩍 뜬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짓과 입 모양으로 민준에게 청소기를 가지고 오라고 한다. 민준은 싱크대 밑에 놓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양손에 쥐고 영이의 지휘에 맞춰 바닥에 흩뿌려진 재를 쓴다. 


청소를 마치고 둘은 마주 본다. 재를 흠뻑 뒤집어쓴 모습을 보고 소리 없이 깔깔대며 서로를 털어준다.


민준이 문을 연다. 고동색 바람막이를 입은 남자가 서 있다. 그의 뒤로 빌라 입구에 우산을 든 남자 두 명이 보인다. 바람막이 남자가 공무원증을 들이밀며 호강 경찰서의 반해신 경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너희 아버지는 어디 가셨니?”


민준에게 묻는다. 인자하지만 단단한 눈빛이다. 나이는 사십 대 중반이지만 눈가의 자글거리는 주름과 희끗희끗하게 난 흰머리 때문에 더 들어 보인다.


민준은 가늘게 뜬 눈으로 해신을 훑는다. 영이와 함께 서 있는데도 서슴지 않고 민준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물었다. 민준을 쳐다보고 있는 듯하지만 연신 눈동자를 굴리며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는 행동도 의심스럽다.


“신고가 들어왔거든.”


민준의 경계심이 느껴졌는지 반해신 경감이 해명하듯 덧붙인다.


“얘네 아버지가 얘를 때렸어요. 그러곤 어디 나갔어요.”


영이가 나서서 말한다. 그러자 반해신 경감이 고개를 갸웃한다.


“여자 비명이 들린다고 신고가 들어왔는데.”

“그건 저일 거예요. 제 친구가 맞는 걸 봤거든요.”

“맞아요. 맞았어요.”


민준이 입고 있는 티셔츠를 뒤집어 까서 배를 보여준다. 해신은 대충 살펴보는 척을 하더니 옷을 내려준다. 하지만 얼굴에는 해소되지 않은 의심이 가득하다.


영이가 형사의 질문에 따라 목격한 것을 진술한다.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는 솜씨에 민준은 혀를 내두른다. 아버지가 씩씩대며 집을 빠져나갔다고 말한 부분에서는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이가 반사적으로 휘두른 십자가에 심장이 찔려 재가 되었다.


빌라 앞에 검은 차 한 대가 멈춰 선다. 영이의 집에서 일하는 여자가 계단을 내려오더니 영이의 손을 잡고 데리고 간다. 계단을 오르면서 영이가 민준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든다. 민준도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로 화답한다.


민준은 경찰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된다. 전면 창을 때리던 빗줄기가 차차 잦아들더니 병원에 도착하자 뚝 그친다.


표지: Copilot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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