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서휘 Oct 04. 2024

연재소설_14화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빗줄기가 창을 때리는 소리에 민준은 눈을 뜬다. 여름비가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다. 


이 기세로 사흘을 내리퍼부으면 범람한 빗물이 집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시원한 빗속을 영이와 함께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하교할 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영이는 물웅덩이만 보이면 장화 신은 발을 담그고 첨벙댄다. 민준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집 앞에서 영이가 들어가기를 주저한다. 마침 민준도 영이를 들여보내기 아쉬운 터다. 


둘은 자연스럽게 민준의 집을 향해 걷는다. 비탈진 언덕을 타고 빗물이 세차게 밀려든다. 민준의 신발이 금세 젖는다. 양말까지 젖어 찝찝하다. 민준이 빗물을 피하면서 엉거주춤 걷자 영이가 물웅덩이에 민준을 밀어 넣는다.


“야!”


민준이 소리치자, 영이가 깔깔댄다.


“아무리 조심해 봐라. 안 젖나. 이럴 땐 그냥 확 젖는 게 나아.”


민준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껏 적시기로 한다. 여름용 운동화는 한 켤레뿐이라는 생각이 스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용추빌라 앞에 도착한다. 종일 내린 비가 빌라 입구에 넘실댄다. 집에 물이 들어올까, 하는 걱정이 스치자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생각나는 곳은 하나뿐이다.


민준은 자신의 피난처인 놀이터로 영이를 데리고 간다. 그네며 벤치며 모두 물에 젖어 있다. 눈동자를 부지런히 굴려 앉을 곳을 찾는데 영이가 작게 감탄한다.


“놀이터 진짜 오랜만에 온다.”


어린애다운 미소를 짓는 영이를 보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우리 그네 타자.”


영이가 민준의 소매를 잡고 그네로 이끈다.


“다 젖었는데?”

“뭐 어때. 이미 다 젖었는데.”


영이가 우산을 옆에 놓고 그네에 오른다. 민준도 똑같이 따라 한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물에 머리카락이 젖지만 몸은 열기가 날 정도로 뜨겁다.


나란히 그네에 오른다.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는다. 그네 밑에 생겨난 물웅덩이를 피해 발을 굴려 공중에 떠오른다. 그네를 타자 엄마와 손잡고 걸어가던 영이가 생각난다. 죽일 듯이 자기를 노려보던 영이의 눈빛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민준이 말한다.


“예전에 그네 타다가 너 봤는데.”

“나도 너 봤어.”

“근데 왜 못 본 척했어?”

“부끄럽잖아. 같은 반 애한테 전도하는 모습 보여주는 거.”


영이의 짧은 말이 민준의 가슴을 찌르르 울린다. 민준은 영이를 집에 데리고 올 때 누추한 자기 집을 보여주기가 창피하다는 생각만 했다. 미처 영이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다. 


영이의 집이 몇 배는 크고 비싸고 좋으니까. 민준의 집에 전도하러 온 영이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고개를 들고 다리를 앞뒤로 젓자 그네가 솟아오른다. 빗물이 눈에, 코에, 입에 들어간다. 그런데도 멈추고 싶지 않다. 민준은 몸에 반동을 주어 더 높이 솟아오른다. 이대로 영이와 함께 하늘로 날아가고 싶다. 


옆에서 영이가 뒤따라 오르지만 민준의 절반 정도밖에 닿지 못한다. 민준은 그네를 멈추고 영이의 뒤에 서서 힘껏 밀어준다. 점점 높이 솟아오르자 영이가 무서운 건지 신이 난 건지 모를 비명을 지른다.


그네에서 내린 영이가 시소로 달려간다. 민준은 영이보다 한 칸 앞에 앉아 무게를 맞춘다. 쿵, 쿵 시소가 바닥에 찧을 때마다 영이가 까르르 웃는다.


놀이기구를 한 번씩 체험한 다음 나란히 벤치에 앉는다. 물을 흠뻑 머금은 옷 때문에 몸이 무겁다. 손은 퉁퉁 붇고 흠뻑 젖은 신발 안의 발은 잔뜩 쪼그라든 느낌이다. 


엉망이 된 민준의 몰골을 보고 영이가 깔깔거린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배를 잡고 웃는다. 민준도 따라서 마구 웃는다.


민준은 영이를 집 앞까지 바래다준다. 돌계단을 오르던 영이가 달려와 민준을 와락 껴안는다. 


민준은 사방에 달린 CCTV를 먼저 살핀다. 그러다가 포기하고 영이를 안는다. 물비린내와 땀 섞인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떨어지지 않는다. 영이에게서 느껴지는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


영이를 들여보내고 민준은 집으로 향한다. 빗줄기가 다시 거세지고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가 들린다. 삼 초 후에 민준의 집 부근에서 번개가 번쩍한다. 


그제야 멈췄던 시계가 다시 작동하는 것처럼 허기가 느껴진다. 무엇이든 집어넣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배가 고프다. 


평소처럼 지영 해장국으로 향한다. 온통 젖어서 가게에 앉아 먹긴 힘들 것 같으니 포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샤워하고 뜨끈한 선지해장국을 먹을 생각에 벌써 설렌다. 영이에게도 맛보이고 싶었지만 외식은 금지되어 있어서 힘들다고 영이가 말했다.


민준은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점순 아줌마가 뚝배기를 나르고 있다. 지영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민준을 발견한 점순 아줌마가 대뜸 묻는다.


“민준아, 무슨 일이야?”

“포장 좀 하려구요.”

“지영이가 이미 갔는데? 길이 엇갈렸나?”

“어딜 갔는데요?”

“어디긴 어디야. 느이 집이지.”


점순 아줌마가 웃음을 터트린다.


“네?”

“네 아빠가 선지해장국 두 개 가져다 달라고 하던데……. 얘야! 민준아!”


민준은 비를 뚫고 질주한다. 용추빌라의 계단을 와다다 내려간다. 문고리를 덥석 잡았으나 돌리지 못한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내가 감히 아버지의 식사를 방해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잔뜩 굶주려 있다. 민준의 사냥이 넉 달 전에 멈춰 있는 탓이다. 현관문에 귀를 갖다 댄다. 안에서 여자의 비명이 조그맣게 들려온다. 민준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연다.


지영이 보인다. 그녀는 한 손으로 목을 감싸 쥐고 있다. 목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흘러나온다. 다른 한 손으로는 바닥을 기며 안방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아버지가 지영의 다리를 잡아 방 안으로 끌어당긴다. 아버지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차 있다. 반달 모양으로 휜 두 눈은 새빨갛고, 송곳니가 비죽 튀어나온 입은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다. 지영이 점점 안방으로 끌려 들어간다. 간절한 비명 소리가 방안에 울리지만 현관문과 창문에 붙은 방음 스펀지에 막혀 무기력하게 차단된다.


민준은 무언가에 홀린 듯 지영에게 다가간다. 지영이 피 묻은 손을 뻗어 민준의 손을 잡는다. 손의 떨림이 민준에게 전해진다. 


민준은 지영의 손을 잡은 채 눈앞에 펼쳐진 살풍경을 둘러본다. 절규로 찬 안방, 장판에 뚝뚝 떨어지는 피, 공포와 애원으로 일그러진 지영의 얼굴……. 


원래대로라면 안방 문을 닫고 제 방에 가야 한다. 가서 이어플러그를 꼽은 채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책을 뒤적여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민준은 제 손을 본다. 응고된 피가 손바닥의 주름에 따라 갈라진다. 문득 이 모든 게 번거롭고 지겹게 느껴진다.


“민준아, 살려줘……!”


지영이 애원한다. 아버지가 지영의 목덜미에 쩍 벌어진 입을 들이댄다. 이제 지영은 굶주린 아버지에게 모든 피를 빼앗길 것이다. 생명을 갈구하는 저 눈빛도, 생기 넘치던 볼과 입술도 빛을 잃을 것이다. 


그 순간 지영의 얼굴 위로 만두의 얼굴이 겹친다. 귀에서 영이의 목소리가 울린다.


‘넌 안 그러잖아. 넌 인간을 죽이지 않지?’


번쩍 정신이 든다.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베개 옆에 놓인 초록병을 발견한다. 그걸 손에 쥐고 아버지의 얼굴을 후려친다. 아버지가 얼굴을 감싸 쥐고 지영의 몸에서 떨어진다.


“도망쳐!”


민준이 소리치자 지영이 몸을 일으켜 덜덜 떨리는 다리로 안방을 빠져나간다. 민준의 등 뒤로 쿵, 하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난다.


“너……! 이 새끼!”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으아악!”


민준이 괴성을 지르며 소주병으로 아버지의 머리통을 내리친다. 소주병이 박살 나고 아버지가 바닥에 나뒹군다.


민준은 달아난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마구 달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입 밖으로 쏟아져나올 것 같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피를 마신 아버지는 금세 일어설 것이다. 실성한 아버지가 어떤 행동을 할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그런 짓을 했다니. 공포와 절망, 후회와 죄책감이 어지러이 뒤섞여 토를 할 것만 같다.


정신없이 달려서 도착한 곳은 영이의 집이다. 여기에 오면 안 되는데, 여기밖에 올 곳이 없다. 민준은 피를 잔뜩 묻힌 손으로 철문을 마구 두드린다.


“영이야! 영이야!”


잠시 후 철문이 열린다. 말끔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영이가 우산을 쓰고 계단을 내려온다. 민준의 몰골을 보고 화들짝 놀라면서 우산을 집어던지고 달려온다.


“민준아! 무슨 일이야!”


영이가 민준의 어깨를 감싼다. 민준은 떨리는 몸을 그대로 맡기고 거친 숨을 내뱉는다.


“영이야, 십자가를 줘……. 거실에 있는 은 십자가…….”

“무슨 일이냐고!”

“아버지가…… 지영이를…….”

“알겠어. 잠깐만 여기에 있어.”


더 이상 묻지 않고 영이가 집 안으로 들어간다. 민준은 두 무릎을 양손으로 감싸고 앉은 채 하염없이 비를 맞는다. 영이가 이대로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다. 온몸에 피를 칠하고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영이가 계단에서 내려와 민준 앞에 선다. 품에 은 십자가를 꼭 껴안고 있다.


“일단 경찰에 신고했어. 이제 너희 집으로 가자.”

“안돼!”


아버지는 피를 갈구하고 있다. 영이를 지옥에 끌고 갈 수는 없다.


“아버지는 피를 마셨어. 곧 힘이 강해질 거야. 내가 해야 해.”


“십자가도 못 들면서 무슨! 그럼 같이 가. 십자가만 들어줄게.”


“그럼 약속해. 절대, 절대, 집 안에 들어오면 안 돼. 무슨 소리가 나도 절대 안 돼. 알겠어?”


민준이 비장하게 묻자 영이도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언덕길을 걸으며 민준은 양팔로 어깨를 감싼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한기가 도저히 가시지 않는다. 두려움 때문인지, 사정없이 퍼붓는 비 때문인지, 은 십자가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냥 다 내려놓고 영이와 빗속에서 뛰놀고 싶다.


표지: Image by Rabia029 from 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