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엽은 집을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가까워질수록 배의 통증도 차츰 가라앉았다.
이제 집에 있어도 편하지 않았다. 집에 방문한 후로 엄마가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무엇을 먹는지부터 지금 무엇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까지 간섭하는 기나긴 잔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장이 비틀리는 듯한 복통이 찾아왔다. 이러다가 또 기절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통증이 거셌다.
하지만 그만하라고 소리칠 수는 없다. 본가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나와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도 엄마니까. 물론 동엽에게 독립할 것을 권유한 정신과 의사가 얼마나 돌팔이인지 증명하기 위함이었지만.
동엽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 입구에 들어섰다. 엄마한테는 스펙을 쌓기 위해 인턴으로 취직했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근무 시간만큼은 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 기쁨에 취해 4층 계단을 가뿐하게 올라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저 왔어요!”
그러나 반기는 이가 없었다. 송이와 지후는 컴퓨터 앞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동엽이 가까이 가자 그제야 알아챈 듯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오, 너 마침 잘 왔다.”
송이가 대뜸 파란색 명함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너 이모탈 호텔에 대해서 잘 알지? 거기서 일했으니까.”
“일일 알바만 몇 번 한 거예요.”
“잘 생각해 봐. 호텔 분위기나 이용객이 다른 호텔과 좀 다르지 않았는지.”
“음…….”
동엽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가 답했다.
“부자들이 많이 오죠.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고급 호텔이니까.”
“아니…….”
송이가 눈을 질끈 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러는데요?”
“명함에 나온 주소를 검색하니까 이모탈 호텔이 뜨잖아. 거기에 회사도 같이 있어?”
동엽은 명함을 자세히 살펴봤다. 딜레마라는 회사의 명함이었는데 적혀 있는 주소가 이모탈 호텔과 똑같았다. 그때 무언가가 번뜩하고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검은 정장 입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긴 했어요. 근데 비즈니스 차 올 수도 있으니까 이상하다고는 생각 안 했죠.”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송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딜레마라는 회사는 건강식품이나 의료 기기를 파는 곳이었어. 대표가 류현상이란 사람인데 아무리 검색해도 이력이 나오지 않아. 좀 의심스럽긴 한데 거기서 구매한 제품을 리뷰하는 블로그 글이 여럿 있는 걸 보니 실재하는 회사는 맞는 것 같고…….”
“회사든 아니든 뭐가 문젠데요?”
동엽이 물었다.
“아, 너는 자리에 없었구나. 증후인 중의 한 명이 목숨을 잘라 팔았다잖아. 건강 증진을 목표로 하는 회사에 목숨을 팔았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지 않아? 이럴 때 하연이가 있었으면 서버를 해킹하는 건데…….”
“하연이가 누군데요?”
동엽이 묻자, 송이가 헛기침을 하더니 시선을 피해버렸다. 누군지 아냐고 지후에게 묻는 눈빛을 보냈으나 지후도 말이 없었다.
“호텔에 좀 가자.”
갑자기 송이가 의자에 걸어둔 가죽 재킷을 집어 들었다.
“지금요? 저 이제 막 출근했는데요?”
“근데?”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송이가 눈을 뻐끔거렸다. 말문이 막힌 동엽이 울상을 짓자 지후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동엽 씨. 목숨을 잘라 팔았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도요. 우리는 그걸 알아보려고 딜레마에 가는 거예요. 근데 알잖아요. 잠입할 수 있는 건 우리 중에 동엽 씨밖에 없다는 거.”
지후가 눈꼬리를 잔뜩 내리고 부탁의 눈빛을 보냈다. 마음이 약해진 동엽은 가기로 마음을 바꿨으나 퉁명스러
운 표정은 풀지 않고 송이에게 물었다.
“가서 뭘 하면 되는데요?”
“어떻게 생겨 먹은 곳인지 회사 내부를 둘러봐야지. 근데 너 옷이 그런 거밖에 없어?”
송이가 기분 나쁜 눈빛으로 동엽을 위아래로 훑었다. 동엽은 게임 축제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와 칠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래는 엄마가 사준 것이지만, 그래도 위에는 게임 캐릭터가 그려진 한정판 티셔츠였다. 뭐라 대꾸하려는데 송이가 대뜸 물었다.
“너 사이즈 뭐야?”
“3XL요.”
송이가 가죽 재킷을 소파로 던지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3XL 정장 한 벌하고, 서류 가방 적당한 거로 가져다줘.”
전화를 끊은 지 5분도 안 돼서 사무실 벨이 울렸다. 헬멧을 쓴 배달 기사가 천으로 된 정장 가방과 비닐에 포장된 검은색 서류 가방을 넘기고 사라졌다.
송이가 동엽에게 사이즈가 맞나 입어 보라고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동엽은 정장 가방 지퍼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택이 달린 새 상품이었는데 가격이 무려 69만 원이었다.
동엽이 경탄에 찬 눈으로 송이를 바라봤다. 송이는 매일 후줄근한 티셔츠에 똑같은 청바지만 입었다. 출동할 땐 그 위에 해진 가죽 재킷을 덧입었다. 그런 사람이 어디서 이런 큰돈이 났는지 의아했다.
“어때요?”
지후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동엽이 양손을 벌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동엽의 의자에 앉아 있던 지후가 “멋진데요?”하고 칭찬했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송이는 고개를 들어 힐끔 보더니 말했다.
“그, 뭐지? 강력한 친구들 같네.”
“강한친구 대한육군이요?”
차오르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동엽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송이가 정정했다.
“아니, 경호 업체 말이야.”
동엽은 차마 짜증은 못 내고 얼굴만 구겼다. 참으라는 듯 지후가 다가와 동엽의 등을 토닥이고는 서류 가방을 건넸다.
“필요한 물품들을 안에 넣었어요. 승우 씨 만나러 갔을 때처럼 해주면 돼요.”
동엽은 가방에서 스마트 안경과 초소형 무전기를 꺼내 착용했다. 왼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오른손에는 스나이퍼 건을 들려는데 송이가 막아섰다.
“입구에서 붙잡힐 일 있어? 리볼버 가지고 가.”
동엽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물약이나 줘요.”
“택시 타고 같이 갈 거야. 우리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송이가 일어섰다. 지후도 의자에서 일어나 출장용 가방을 멨다.
택시가 금세 이모탈 호텔 앞에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린 동엽은 고개를 한껏 꺾어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봤다. 30층 높이의 건물이 가을 햇살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피라미드처럼 뾰족한 꼭대기가 하늘을 찌를 것처럼 위용을 뽐냈고, 그 아래에 달린 거대한 LED 스크린에서는 호텔 광고가 흘러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 직원이 거대한 문을 열어주었다. 알바하러 올 땐 웬 쥐구멍 같은 출입구로 들어왔던 터라 동엽은 괜히 목에 힘이 들어갔다.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5미터 높이의 천장에는 육중한 샹들리에가 다섯 개나 달려 있었다. 벽에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뭘 뜻하는지 모르는 추상화가 여러 곳에 걸려 있었다. 입을 벌린 채 호텔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동엽에게 송이가 말했다.
“너는 엘리베이터로 가. 나랑 지후는 카페에 있을게.”
“네? 저 혼자요? 앗, 저 화장실 좀…….”
동엽이 한 손으로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송이가 한 소리 하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떼자 지후가 나섰다.
“동엽 씨. 긴장하셨나 보네요. 편하게 일 보시고 무전기로 연락해 주세요.”
동엽은 종종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송이와 지후는 로비 한편에 마련된 카페로 이동했다. 카페엔 차분한 분위기의 클래식이 흐르고 있었고, 띄엄띄엄 앉은 사람들이 소곤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후가 자리를 잡는 동안 송이는 계산대로 향했다. 환하게 웃는 여자 직원에게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4만 3천 원이 찍힌 영수증을 받고 자리로 돌아왔다.
지후는 흑갈색 원목 탁자에 태블릿을 올려놓고 조작하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스마트 안경까지 쓰고 있으니 여기에서 일하는 사원처럼 보였다.
“얜 아직도 안 나왔어?”
송이가 탁자에 올려져 있는 초소형 무전기를 귀에 끼면서 물었다.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아가씨 이리 와 봐.”
바이올린 선율을 뚫고 어느 남자의 목소리가 카페에 울려 퍼졌다. 송이의 앞 테이블이었다. 흰색 폴로 셔츠에 분홍색 골프 바지를 입은 남자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직원을 향해 까딱까딱 손짓을 했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손목에 찬 금팔찌가 번쩍였다.
검정 재킷과 스커트를 반듯하게 차려입은 카페 직원이 구두 소리를 또각거리며 걸어왔다. 송이의 주문을 받았던 여자였다.
직원이 다가오자 골프바지 남자가 삼분의 일만 남아 있는 빙수 그릇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이 망고 빙수에 들어간 망고, 냉동이지?”
직원이 친절이 밴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고객님. 저희는 매일 새롭게 들여오는 생망고로 만들고 있습니다.”
“야, 내 입이 잘못됐다는 거야? 9만 원 넘는 음식을 팔면 제대로 팔아야 할 거 아냐?”
말할 때마다 빙수 그릇을 툭툭 치더니 그릇이 결국 바닥에 떨어졌다. 댕그랑 소리가 카페에 울려 퍼지면서 빙수가 사방에 튀었다. 노란색 국물이 직원의 종아리에도 점점이 묻었다.
직원이 스커트를 엉덩이부터 오금까지 쓸어내리며 쪼그려 앉은 후에 빙수 그릇을 줍고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고객님,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직원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뒤돌아서려 했다. 그러자 골프바지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그러고는 인상을 잔뜩 쓴 채 명령조로 말했다.
“수건 가지고 와. 바지에 다 튀었잖아.”
직원은 또 한 번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계산대를 향해 걸어갔다. 웃는 낯빛에는 한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남자가 하는 짓을 매서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송이는 시선을 옮겨 카페 안에 있는 다른 손님들을 둘러봤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나서는 이는 없었다.
“아이 씨…….”
송이가 궁둥이를 떼자 지후가 송이의 소매를 잡았다.
“참으세요. 오늘은 소란 피우면 안 돼요.”
송이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우울 측정기를 꺼내 지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봐.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이라고.”
“그게 뭐 어때서요? 오늘은 증후인 만나러 온 게 아니잖아요. 왜 스마일 마스크 증후인만 만나면 나서지 못해서 안달이에요?”
그때 직원이 수건을 들고 앞 테이블로 걸어왔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걸로 닦으세요.”
“야, 이걸 내가 닦으리? 니가 닦아.”
남자가 의자 밖으로 다리를 주욱 내밀었다. 직원은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쪼그려 앉아 남자의 다리를 닦기 시작했다.
“너 내가 여기 VIP인 거 몰라? 등록비가 네 연봉보다 비싸, 알아? 여기서 일한다고 너도 막 고급스러워진 거 같고 그래? 하, 참나…….”
골프바지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낄낄거렸다.
송이가 참지 못하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지후가 송이의 팔을 붙잡고 완강하게 버텼다.
“조사하러 와 놓고 소란 피워서 인상 남길 필요 없잖아요. 저분도 조용히 넘어가길 바랄 수도 있구요.”
지후가 계산대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남자의 다리를 다 닦고 자리로 돌아간 직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료와 대화를 나누며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저게 다 진짜 같아? 웃는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고.”
송이가 따졌다.
하연이, 하연이가 그랬다. 회사에서 시달려도 신드롬 사무실에서만큼은 늘 환하게 웃었다. 차라리 아프다고 말하지, 왜 버티려 했던 거야, 멍청하게.
“누구나 싫어도 좋은 척해요. 그게 사회생활이에요.”
지후가 단호하게 말했다.
송이는 골프바지 남자를 노려봤다. 검은색 폴로 셔츠를 입은 옆의 남자와 계산대에 있는 직원을 힐끔대며 깔깔대고 있었다. 목소리가 커서 듣고 싶지 않아도 다 들렸다. 직원의 얼굴과 몸매를 평가하는 중이었다.
“지후야. 미안한데 난 사회생활엔 젬병이라.”
송이가 지후의 가방에서 리볼버와 노란색 탄을 꺼냈다. 회전 약실에 원래 꽂혀 있던 연노란색 탄을 빼고 개나리처럼 짙은 노란색 탄으로 갈아 끼웠다.
“그건 뭐예요?”
지후가 질겁했다.
“핵 스마일 탄.”
송이가 짧게 대답하고는 리볼버를 쥔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공이치기를 당기고 손목을 움직여 남자를 조준했다. 방아쇠에 양 검지를 포개 놓은 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당기면서 동시에 기침 소리를 냈다.
“에이취!”
탄이 정확하게 남자의 허벅지에 꽂혔다. 남자는 모기에 쏘였다고 생각하는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탁탁 때렸다. 그런데 갑자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남자가 당황스러워하며 입가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으나 그럴수록 눈은 처지고, 입꼬리는 위로 솟았다.
“아, 아하하…… 내가 왜 이러지 하, 하하핫!”
남자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또다시 손님들의 이목이 쏠렸다. 손님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남자를 힐끔거리면서 같이 온 사람들과 쑥덕였다. 송이는 남자의 허벅지를 향해 총을 한 발 더 쐈다.
“아하하하하학!”
남자가 배를 움켜쥐고 깔깔대다가 의자에서 자빠졌다. 남자의 새하얀 폴로 셔츠에 검은 자국이 묻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경기에 가까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송이는 지후가 쓰고 있는 안경을 벗기고 자신이 썼다.
“뭐, 뭐 하려고요!”
지후가 기겁한 얼굴로 송이와 골프바지 남자를 번갈아 봤다.
“잠깐 태블릿 좀.”
송이는 빠른 손놀림으로 스마트 안경에 녹화된 영상을 USB에 집어넣었다. 그다음 가죽 재킷을 벗고 지후의 가방에서 형광 안전 조끼로 갈아 입었다.
그러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골프바지 남자를 바라보면서 웃음을 참고 있던 여자 직원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송이는 그녀가 가슴에 단 명찰을 봤다. 이름이 주하경이었다. 이름도 비슷하네, 송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방송실이 어디죠?”
“무슨 일 때문이시죠?”
하경이 친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안전 점검 나왔습니다.”
하경의 눈동자가 송이와 어깨 너머의 지후를 분주히 왔다 갔다 했다. 잠깐 고민하는 눈빛이 스쳐지나갔으나 이내 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하 1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여기는 몇 시에 문을 닫나요?”
“저녁 여덟 시에 닫습니다.”
송이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방송실이라는 표찰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철로 된 문을 벌컥 열었다. 방송 장비 앞에 앉아 있던 정장 입은 사내 둘이 벌떡 일어났다. 양손을 벌리며 저지하려는 걸 보고 송이가 선수를 쳤다.
“심부름 왔습니다. VIP께서 저녁에 가족 행사가 있다고 야외 스크린으로 이걸 틀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송이가 USB를 내밀었다. 정장 입은 남자 둘이 말의 진위를 가늠하듯 시선을 주고받더니 앞에 있는 남자가 꾸물거리며 USB를 받았다.
“8시 10분에 딱 맞게 틀지 않으면 큰일날 줄 알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송이가 쐐기를 박듯 말을 던지고는 문을 닫고 나왔다.
이 호텔의 전광판은 흥함동 어디에서도 보인다. 퇴근하는 하경이 영상을 보면서 진짜 웃음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덤으로 이모탈 호텔 컴퓨터에 바이러스도 심을 수 있다. 하연이가 만들어 준 바이러스가 심긴 USB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송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후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돌아왔다.
한편, 볼일을 마친 동엽은 로비 한편에 마련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총 여섯 대가 있었는데 세 개씩 마주 보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안쪽 엘리베이터 중 한 대에는 ‘25층 이상 전용’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위로 올라가는 버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파란색 태그기가 달려 있었다. 출입용 카드키가 필요한 듯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벨보이 한 명이 캐리어를 실은 카트를 밀면서 다가왔다. 그가 동엽을 향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얼떨결에 따라 인사한 동엽은 고개를 돌려 층이 표시되는 LED 화면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고층으로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도통 올 생각을 안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또다시 아랫배에 콕콕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동엽은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엘리베이터가 어서 오기를 기도했다.
23층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벨보이가 친절한 미소로 먼저 타라고 권했다. 동엽은 어색하게 웃으며 먼저 가라는 손짓을 했다. 벨보이가 또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동엽의 등 안쪽에서 뜨거운 땀이 주룩 흘렀다.
다음으로 도착한 엘리베이터에는 다행히 타는 사람이 없었다. 동엽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자, 초소형 무전기에서 송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버튼 쪽 봐봐.
동엽이 문어 빨판처럼 다닥다닥 달린 층수 버튼에 스마트 안경을 낀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나씩 눌러 봐.
버튼을 하나씩 눌러 보면서 동엽이 말했다.
“불이 들어오는 건 로비하고 부대 시설이 있는 2층밖에 없어요. 3층부터 24층까지는 버튼을 눌러도 불이 들어왔다가 꺼져요. 객실 카드키를 대야 하나 봐요. 25층부터는 아예 눌러지지도 않고.”
―잠깐만. 옆에 붙은 안내문에 ‘15층부터…’하고 그 옆에 뭐라고 쓰여 있어?
동엽은 갈색 안내문에 적힌 흰 글자를 또박또박 읽었다.
“15층부터 24층은 온리 브이아이피 룸입니다.”
―VIP 전용으로 십 층이나 쓴다고?
“그러게요.”
―25층부터는 뭐라고 쓰여 있어?
“디, 아이, 엘….”
―딜레마?
“오, 맞아요!”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던 젊은 남녀가 층수 버튼에 얼굴을 박고 있는 동엽을 보더니 흠칫하고 어깨를 떨었다. 동엽은 재빨리 이곳이 몇 층인지 확인했다. 2층이었다. 동엽은 마치 내리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비상계단을 통해 1층 로비로 내려와 약속한 카페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송이와 지후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가 지후의 옆자리에 앉아 숨을 헐떡거렸다.
“어우 씨, 죽을 뻔했네.”
“동엽 씨, 고생했어요. 덕분에 정보를 많이 수집했어요.”
지후가 방긋 웃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동엽은 기분이 고양되는 걸 느끼며 송이에게 물었다.
“이제 됐나요? 사무실로 갈까요?”
“너 VIP층에 가 봐.”
“네? 어떻게요?”
“물약 마시면 되지.”
“남의 방에 들어가라고요?”
동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렇구나. VIP층이 전부 객실이라면 잠입하기가 쉽지 않겠구나.”
송이가 콧김을 길게 내뿜으며 등받이에 털썩 등을 기댔다.
그때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둘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곧장 계산대로 가더니 하경에게 말을 붙였다. 몇 마디를 나누자 가면을 쓴 것처럼 미소 짓고 있던 하경의 낯빛이 굳어졌다. 하경이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계산대에서 나왔다. 하경이 카페를 나서고 남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남자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봤다.
“어?”
송이가 먼저 알아보고 소리를 냈다. 눈이 마주친 남자도 송이를 알아봤는지 눈을 크게 떴다. 동료에게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송이야! 지후도 같이 있었네!”
광한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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