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는 광한을 보고 지후는 똥줄이 탔다. 광한의 입에서 이직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면 어쩌나 싶었다. 아직 송이에게 운도 못 띄었는데 다른 사람의 입으로 먼저 듣게 해서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송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광한을 기다렸다. 지후도 따라 일어나면서 송이를 힐끔댔다. 사실 송이가 더 걱정됐다. 원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서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만약 딜레마를 뒷조사하고 있다는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광한은 지후가 그 일에 동조하고 있다는 걸 알아챌 테고, 그 순간 이직의 기회도 날아가는 것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어느새 다가온 광한이 놀란 표정으로 송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송이는 무표정한 채로 손을 맞잡았다.
인사말을 나누는 두 사람을 지후는 불안한 눈동자로 지켜봤다. 앉아 있기가 너무 불편해서 차라리 광한에게 카톡을 보내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잠깐 앉아도 돼?”
광한이 송이 옆자리를 가리켰다.
“응. 여긴 새로운 직원, 이동엽 씨.”
광한이 채 앉기도 전에 송이가 건너편에 앉은 동엽을 소개했다. 동엽이 소파에서 엉덩이만 뗀 채로 고개를 꾸벅했다. 광한이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저도 올해 1월까지는 신드롬에서 일했어요. 송이 밑에서 일하는 게 쉽지 않죠?”
“아뇨, 아주 좋습니다.”
동엽이 손을 맞잡으며 기계처럼 답했다. 그러자 광한이 너털웃음을 쳤다.
“하하하, 잘 부탁해요. 우리 송이.”
“우리 송이? 우웩.”
송이가 토하는 시늉을 하고는 광한에게 물었다.
“넌 여기서 일하는 거야?”
“응.”
“호텔? 아니면…….”
“객실 위에 회사가 있어.”
송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광한이 대답했다. 송이가 새로운 사실을 안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래? 뭐 하는 회사인데?”
“건강 기능 식품이랑 의료 기기를 팔아.”
광한이 콧망울을 두 번 긁적이더니 눈동자를 굴려 지후를 바라봤다. 지후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광한의 입술만 쳐다봤다.
“근데 하경 씨한테는 왜 간 거야?”
송이가 물었다.
“하경 씨? 아, 아까 그 여자? 맞네. 우울 측정기에도 떴겠구나.”
송이의 물음에 대답하고 있지만 광한의 시선은 계속 지후를 향하고 있었다. 광한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지후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멘탈 케어 같은 거야. 우리 회사가 건강 관련된 회사다 보니까 직원들 복지에도 힘쓰고 있거든.”
그 말을 하곤 광한이 늘어지게 하품했다. 이어서 입을 가린 손으로 재킷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가글처럼 생긴 작은 페트병을 꺼냈다. 병에 든 주황색 액체에서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왔다. 광한이 액체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눈을 몇 번 깜빡깜빡했다. 그러자 반쯤 잠겼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말똥말똥한 눈동자에 비해 낯빛은 여전히 퀭했다.
“요즘은 건강 생각하면서 일하지?”
송이가 물었다.
“한창 일할 나이인데, 뭘.”
광한이 힘없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다 불태우지 마. 적당히 해도 괜찮아.”
송이의 말에 광한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이야, 최송이한테 이런 말을 다 듣네. 너야말로 잠 좀 자고, 밥도 잘 챙겨 먹어.”
광한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송이를 바라봤다.
티격태격하는 송이와 광한을 보고 있자니 지후는 꼭 작년으로 돌아가 신드롬 사무실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뭉클한 심정으로 감상을 말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작년 생각나네요.”
“그러게, 경수 선배까지 있으면 딱이네.”
송이가 덧붙였다.
“하연이도 퇴근하고 올 것만 같다.”
광한도 보탰다. 그러자 약속한 듯이 엄숙한 침묵이 깔렸다.
“대체 경수는 누구고 하연이는 누군데요?”
침묵을 깨고 동엽이 찡얼거렸다.
“동엽 씨라고 했죠? 동엽 씨, 우리끼리만 아는 얘기에서 미안해요. 경수 형은 송이하고 같이 신드롬을 만든 위대한 인물이고, 하연이는 경수 형의 여동생. 지금은…….”
“그만해.”
송이가 광한의 말을 잘랐다. 또다시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후는 송이의 눈치를 살폈다. 광한에게 들어서 아는 거지만, 하연이라는 사람이 병으로 죽었는데 그 후로 송이가 굉장히 힘들어했다고 했다.
무슨 생각을 떠올리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송이가 갑자기 광한과 지후를 번갈아 가리켰다.
“맞다! 너희 둘이 오랜만에 보지?”
광한이 코를 긁적이며 지후를 쳐다봤다. 지후는 숨도 못 쉬고 광한의 입만 쳐다봤다. 광한이 금방이라도 지난번 만남에서 나눈 이야기를 쏟아낼 것 같았다.
“그렇지. 잘 지내지, 지후야?”
지후는 참았던 숨을 짧게 터트리고 억지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형도 잘 지내시죠?”
“응, 그럼. 나는 이제 가 봐야겠다. 다음에 술 한잔하자. 동엽 씨도 파이팅하시구요. 송이도 몸 챙기고.”
모두와 인사를 나눈 광한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끝까지 응시하던 송이가 광한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입을 열었다.
“뭐가 있긴 있네.”
“왜요?”
동엽이 물었다.
“광한이가 나한테 비밀이 있잖아.”
무슨 말인지 아냐고 묻듯 동엽이 지후를 바라봤다. 지후도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저었다. 송이가 말했다.
“광한이는 대답하기 애매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콧방울을 긁거든. 아마 쟤도 내가 여기에 팔자 좋게 커피나 마시러 온 게 아니란 것쯤은 알았을 거야. 2년이나 동고동락했으니 나는 모르는 내 부자연스러움을 쟤도 눈치챘겠지.”
“옆에서 들었을 땐 굳이 거짓말할 게 없었는데요?”
동엽이 고개를 갸웃했다. 송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쓰다듬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쟤가 마신 건 각성 물약이야. 한번 마시면 피곤하다는 생각이 싹 가시고 몇 날 며칠은 안 자고 일할 수 있어.”
“그게 왜요? 열심히 일하면 좋죠.”
“일중독 증후인한테서 추출할 수 있는 그 물약을 어디서 구했냐는 말이지. 들고 다니면서 마실 정도면 대량 생산을 한다는 건데.”
“딜레마에도 정신 능력 변환기가 있는 거 아닐까요?”
송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만든 거야. 건강식품과 의료 기기를 파는 회사에 그런 게 필요해 보이지도 않고.”
동엽과 송이의 대화를 들으며 지후는 다리가 덜덜 떨렸다. 송이가 딜레마에 품는 의혹이 점점 커질수록 지후의 죄책감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대로 모른 척하고 넘어갈까? 송이에게 털어놓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까? 치열하게 저울질하던 지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사실 저 얼마 전에 광한이 형 만났어요.”
“알아.”
허공을 노려보고 있던 송이가 입만 움직여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지후가 경악하자, 송이는 별거 아니란 식으로 답했다.
“둘이 전혀 반가워하는 눈빛이 아니었거든. 눈빛 다음에는 말투. 첫마디를 내뱉을 때 목소리가 경직되어 있길래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
송이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네가 말한 그 사회생활이라는 거, 나는 훈련으로 배웠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여덟 살 때부터 대학 생활을 해서 또래와 어울린 적이 없었어. 대학교에선 나보다 서너 배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학업과 연구에 매진했고.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도 혼자만 있으니까 안 되겠다 싶었는지 부모님이 특단의 조치를 내렸어. 이른바 사회성 훈련. 난 카페에 앉아서 하루에 두세 시간씩 카페에 온 손님을 관찰했어. 저건 화가 난 얼굴, 저건 사랑에 빠진 눈빛, 저건 긴장한 손짓, 저건 초조한 발 떨림……. 부모님이 하나씩 짚어가면서 가르쳐주셨지.
근데 자꾸 보다 보니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어. 때론 보여주려는 것 이면에 진실이 있다는걸. 애인이 화장실에 가니까 어딘가로 전화하면서 진짜 웃음을 짓는 여자. 눈앞의 애인을 두고 너머의 여자에게 호기심을 갖는 남자. 웃으며 대화하는 친구들의 경멸 담긴 눈빛 같은 거.”
지후의 머릿속에 카페에 앉은 어린 여자아이가 그려졌다. 시험공부하듯 표정과 몸짓을 보고 감정을 맞혔을 아이. 지후는 송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어떻게 자라왔는지까진 알지 못했다. 외로웠겠구나…….
그런 감정이 피어나자 이 사람에게 더 이상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졌다. 어떻게 되든 거짓말은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숨겨 온 말을 꺼냈다.
“광한이 형한테 이직 제안 받았어요. 딜레마로.”
지후의 말에 송이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것까진 예상 못 한 모양이었다. 지후는 내친김에 추석 때 광한을 만난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지후의 말이 끝나자 송이가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그럼 더더욱 이 위에 올라가 봐야 하겠네? 이직할 만한 회사인지 아닌지 알아봐야지.”
송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가죽 재킷을 걸쳤다.
“오늘은 철수. 좀 더 준비해서 다시 오자.”
테이블에 늘어놓은 걸 정리하면서 지후는 뭔가 모르게 서운했다. 딜레마가 괜찮은 회사면 이직하라는 거야 뭐야……?
다음 날 아침 10시, 송이, 지후, 동엽은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송이가 핸드폰을 탁자 가운데에 놓고 이모탈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다가 전화가 연결되자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폰 모드로 바꾸었다.
―안녕하십니까? 평생의 동반자 이모탈 호텔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송이가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이모탈 호텔 VIP에 가입하고 싶은데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 그러시군요, 고객님. 그런데요, 고객님? VIP 서비스는 프라이빗 멤버십 전용으로 지인 추천이 없으면 가입이 불가능하십니다.
응대하는 직원이 안타깝다는 듯 말꼬리를 내렸다. 송이가 재차 물었다.
“조만간 추천받을 거라서요. 금액이 얼마나 될까요?”
―고객님, VIP 서비스 관련 상담은 담당자를 통해서 안내해 드리고 있습니다. 번호 남겨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전화를 끊었다.
“왜 이렇게 숨기는 게 많아? 궁금해서 미쳐버리겠네.”
송이가 앞머리를 마구 흩트리며 말했다.
“안 되겠다. 동엽이가 잠입하자.”
“네? 제가요?”
동엽이 기겁하자 지후가 달랬다.
“회사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살짝만 보고 오면 돼요.”
“그럼 이제 계획을 세워 보자.”
동엽이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송이가 태블릿으로 이모탈 호텔의 구조도를 띄웠다. 바이러스를 심은 방송실 컴퓨터를 타고 보안팀 컴퓨터에 접속하여 빼낸 자료였다. 각 층의 사무실 좌석 배치뿐만 아니라 비상구, CCTV, 화장실 위치까지 알 수 있었다. 화면을 좌우로 넘겨 보던 송이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25층에서 27층까지는 구역을 세부적으로 나눠서 건강식품 팀, 의료 기기팀, 마케팅홍보팀, 고객지원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28층 좀 봐봐.”
태블릿 화면에 28층의 구조도가 나타났다.
“28층은 가운데에 선 하나 긋고 왼쪽 오른쪽으로만 나뉘어 있어. 아무것도 안 쓰인 왼쪽은 통로인 것 같고, 오른쪽엔 달랑 보안팀, 영업팀, 계약팀, 재무팀밖에 없어.”
“확실히 비교되네요.”
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슬라이드를 넘겼다.
“29층은 심지어 부서명도 없어요.”
“점점 더 재미있어지지 않아?”
송이가 서늘하게 웃으며 검지로 태블릿 화면을 짚었다.
“동엽이가 가야 할 층은 28층. 화장실 구조를 모르니까 실패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자. VIP가 아닌 일반 고객이 올라갈 수 있는 건 14층까지니까 14층에 방을 두 개 잡는 게 좋겠어. 한곳에 모여서 회의하고, 회의 끝나면 나눠서 자고. 너희는 같이 써. 나는 따로 잘게.”
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송이의 말을 핸드폰에 받아적었다. 그런데 동엽이 딴지를 걸었다.
“거기 방을 두 개나 잡는다고요? 거기 하루 숙박이 얼마인지 알고 하는 말이에요? 자그마치 60만 원이에요.”
“그럼 120만 원이네?”
심상하게 말을 던지는 송이를 동엽이 감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서른 살도 안 된 사람이 몇십 몇백만 원을 우습다는 듯이 쓰다니. 아니, 애초에 돈벌이도 안 되는 신드롬을 운영하면서 지후와 동엽에게 활동 지원금을 준다는 게 말이 안 됐다. 혹시 사연이 있어 허름한 건물에 숨어든 재벌가의 딸일까? 그런 망상을 하자 송이가 더없이 신비로워 보였다.
점심도 거르고 이어진 회의의 결과는 이랬다.
신드롬 직원 세 명 모두 딜레마 직원으로 변장한다. 물약을 마신 동엽이 딜레마 사무실 화장실에 잠입해 딜레마 전용 엘리베이터를 1층에 내려보낸다. 거기에 송이와 지후가 타면 동엽이 다시 엘리베이터를 위로 올린다. 셋은 직원인 척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내부를 조사한다.
동엽은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차라리 해가 떨어지고 가자고 의견을 냈으나 밤에는 되려 보안이 강화될 수 있다며 송이가 바로 쳐냈다.
오후 2시가 되자 송이가 새하얀 셔츠 위에 정장 재킷을 걸쳤다. 무릎까지 오는 치마가 어색한지 자꾸 치마 밑단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하나로 모아 묶은 단정한 머리까지 딜레마 직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다른 사람인데요.”
동엽이 송이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봤다.
“출동하다 보면 종종 볼 거예요. 하지만 겉모습에 속지 마세요.”
지후가 동엽에게 속닥였다. 말소리가 들렸는지 송이가 버럭 소리쳤다.
“야! 니들도 평소랑 다르거든?”
동엽도 송이가 사준 정장을 걸쳤다. 거기에 오늘은 특별히 머리에 왁스를 발라 2대 8로 넘겼다. 어제 본 광한을 따라 한 것이었다. 검은 넥타이까지 매고 전신 거울 앞에 선 동엽은 흡족해하며 손바닥으로 머릿결을 쓸어 넘겼다.
신드롬 직원들은 택시를 타고 이모탈 호텔로 향했다. 기사님이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흐르는 택시 안은 평소와 달리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택시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이모탈 호텔 앞에 섰다. 택시에서 내리며 동엽은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봤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호텔이 오늘따라 더 높게 느껴졌다.
체크인하러 프런트로 향하는데 송이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카페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잠깐만.”
“커피 사서 가게요?”
송이의 등에 대고 동엽이 묻자 지후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증후인을 살피러 가는 거예요. 스마일 마스크 증후인만 만나면 유독 예민해져요.”
“왜요?”
“누나는 말을 안 해주는데요. 아끼던 사람이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이지 않았을까, 하고 저는 그냥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요.”
“혹시 남자친구?”
동엽이 음흉한 눈빛을 쏘자 지후가 쓰읍, 하고 입소리를 내며 미간을 찡그렸다.
잠시 후 송이가 아리송해하는 얼굴로 걸어왔다.
“무슨 일 있어요?”
지후의 물음에 송이가 우울 측정기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경 씨의 우울지수가 ‘아주 좋음’으로 바뀌었어.”
“그게 왜요? 좋은 거잖아요?”
동엽이 물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송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프런트로 향했다. 동엽과 지후도 그 뒤를 따랐다.
자작나무처럼 창백하고 마른 남자 직원이 신드롬 직원들을 환대했다. 체크인하는 송이를 지켜보며 동엽은 불안한 눈으로 지켜봤다. 세 명이 왜 방을 두 개 잡는지, 정장을 입고 온 이유는 뭔지, 그런 것들을 물어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직원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얼굴과 목소리로 응대할 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체크인을 마치고 카드키를 받은 세 명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송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딜레마 전용 엘리베이터 태그기에 카드키를 댔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 두 번 더 시도했으나 똑같았다. 때마침 객실용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카트키를 태그하자 14층 버튼에 저절로 불이 들어왔다. 위로 오르기 시작한 엘리베이터는 정직하게 14층에서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송이가 두리번거리더니 천장에 달린 비상구 안내 표지판을 발견하고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동엽이 “1405호는 왼쪽이에요!”하고 제지했지만 송이는 앞만 보고 돌진했다. 동엽과 지후는 후다닥 송이의 뒤를 쫓았다.
복도 끝에서 걸음을 멈춘 송이가 계단실로 들어가는 회색 철문을 열었다. 비상계단이 나왔다. 하지만 위로 가는 길은 또 다른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철문의 문고리를 당겨 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옆에 태그기가 있는 걸로 보아 바깥에서 문을 열려면 출입용 카드키가 필요한 듯했다.
“역시 막혀 있네.”
송이가 말했다. 결과를 예상했는지 전혀 아쉬워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신드롬 직원들은 방향을 틀어 와인색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걷다가 나란히 붙은 방 앞에 헤어졌다. 송이는 1405호, 지후와 동엽은 1406호였다.
동엽은 들뜬 마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널찍한 침대와 협탁이 정중앙에 놓여 있었고, 큼직한 통유리창 앞에는 원형 테이블과 스툴이 배치되어 있었다. 곧바로 창가로 걸어가서 반쯤 닫힌 커튼을 걷었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과 흥함산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절경을 눈에 담으며 침대로 폴짝 뛰어들었다. 고급스러운 매트리스에 몸이 푹 안겼다. 동엽은 팔다리를 위아래로 휘저으며 말했다.
“오늘 이대로 푹 쉬고 싶네요.”
“그렇죠? 근데 절대 안 될 거예요.”
지후의 말을 증명하듯 밖에서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 열어!”
송이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동엽은 아쉬움의 탄성을 내지르고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시작하자.”
송이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말을 쏟아냈다.
“동엽이가 스마트 안경 끼고 28층으로 가. 사무실을 순찰한 다음에 엘리베이터를 밑으로 내려보내.”
“실패하면 어떻게 하죠?”
동엽이 침을 꼴딱 삼켰다.
“실패하면 또 시도하면 되지.”
송이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동엽은 더 불안해졌다. 숨을 크게 내뱉어 긴장감을 털어냈다. 그리고 비장하게 지후가 건넨 스마트 안경을 쓰고 귀에 초소형 무전기를 꽂았다.
지후가 태블릿을 텔레비전 연결했다. 동엽에게 스마트 안경을 켜 보라고 하자, 화면에 송이가 잡혔다. 송이가 재킷 주머니에서 미니 샘플 박스를 꺼내고, 초록색 물약 한 개를 집어 동엽에게 건네는 장면이 화면에 송출됐다.
동엽은 물약을 단숨에 털어 넣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여느 사무실에나 있을 법한 화장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28층이다. 가자, 가자, 가자.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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