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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키모자이크 Oct 18. 2020

<연재소설>영원의 정원 / 제4장 흐려진 의식의 틈으로

"조용히 하지 못 하겠어? 이 미친 고양이들아!"

  검지에 대해 먼저 밝히자면, 그녀는 실체가 없다. 즉, 실존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내 꿈에 나와서 느닷없이 '가슴자랑'을 했던 여자다. (이 꿈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실체가 없는 사람이지만 — 어떤 사정이 있는 관계로 — 나는 검지와 함께 대화를 나눈다. 주제는 감교수 때의 그것과 같다. 감교수와 나는 화법이 다를 뿐인데, 검지와 나는 언어 자체가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감교수가 감탄해 마지않던 탁월한 나의 의견도 검지 앞에선 시금치를 씹는 것처럼 시시한 일이 되어버린다. 이 상황은 마치 폰폰볼(고양이 장난감)을 연상케 한다.


  고양이 두 마리와 폰폰볼이 있다. 지금 이 고양이는 나와 감교수이다. 우리는 대등하게 폰폰볼을 가지고 핑퐁을 한다. 폰폰볼 안에는 마따따비 대신에 '태양신 라'와 '신전의 권력', '종교개혁', '불평등의 탄생' 따위가 들어있다. 우리는 치열하게 폰폰볼을 주고받는다. 어쩌면 이 행위가 우리의 인생(또는 묘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 커다란 인간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와 폰폰볼을 간단하게 집어서 서랍 속에 넣어버린다.


  "조용히 하지 못 하겠어? 이 미친 고양이들아!" 검지가 말한다.


  나와 감교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감교수는 벌러덩 드러누워 발바닥을 핥고, 나는 조용히 기지개를 켠다. 기지개를 켜면서 사실은 그녀를 원망한다. 하지만 금세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가고 싶어 진다.


  이렇듯 나는 늘 그녀에게 '속수무책'이다.


  극장 앞 골목을 벗어나 조금만 걸어 나오면 번화한 거리가 나온다. 눈을 감고도 걸어 다닐 수 있다고 자신하던 이 거리가 부쩍 낯설게 느껴진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 중 하나와 어쩌다가 눈이 마주치면 서로 한참 쳐다보기도 한다. 혹시 아는 사람은 아닌가 하고 양쪽 모두가 확신 없는 시선을 보낸다. 그럴 리가 없지,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자마자 나는 배고픔을 느낀다. 이 거리에서 제법 유명한 만둣집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들어가 요기를 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 옆 지하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간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일부러 더러운 운동화를 신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차피 빨아야 하니까. 어차피 마셔야 하니까.


  나는 헨드릭스 진토닉과 감자튀김을 주문한다. 머들러로 얼음을 달그락 거린다. 가니쉬로 들어간 오이가 투명하게 비친다. 오이의 속살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내 피부도 얇게 저미면 투명할까 생각해본다. 왜 고양이는 오이를 무서워할까 생각한다. 오이는 어떻게 커지는 가에 대해 생각한다. 오이 씨앗 개수를 세보려다 그만둔다. 무엇이 씨앗이고 무엇이 씨앗과 씨앗의 공백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술기운이 오른 탓도 있고 노안이 슬슬 찾아오는 탓도 있다. 나는 스무 살 때 원하던 것처럼 여전히 일렉기타와 자전거, 카메라, 노트북, 닌텐도와 RC카를 원하는데, 어느덧 마흔 살이 되었다.


  흐려진 의식의 틈으로 또각또각 소리가 들려온다. 지하로 내려오는 술집 입구에 어렴풋이 역광을 받은 실루엣이 비친다. 적어도 오이의 실루엣은 아니다. 긴 코트를 입은 여자다. 여자가 문을 열고 술집 안으로 들어온다. 문은 여자가 열었지만 여자보다 먼저 구두가 들어온다. 50만원 정도 되어 보이는 구두다. 또각또각 소리가 내 등 뒤로 지나가다가 멈춘다.


  "어? 당신?" 또랑또랑한 여자의 목소리다. 나한테 말을 걸었을 리 없다. 나는 쓸데없이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번에는 여자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을 건넨다. "아까 극장에 있었죠?" 그건 맞다. 나는 아까 극장에 있었다. 뒤돌아보니 오늘의 공연을 망쳐버린 바로 그 여배우가 서있다. "어? 여자 주인공이시네요?" 나는 말한다. 여자는 웃는다. 극장에서 보던 것과는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다르다. 지금 눈 앞에 서있지만 사실은 실체 없는 여자. 그녀가 바로 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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