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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키모자이크 Oct 18. 2020

<연재소설> 영원의 정원 / 제3장 실비어스와 피비

"아름다운 피비, 제발 나를 동정해 줘"

  그 정원은 늘 희미한 안개에 덮여있다. 정원을 찾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단숨에 집어삼키고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한 꽃을 피운다. 나뭇가지를 흔든다. 사람들은 정원에서 위로를 얻고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정원 구석의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는 들짐승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켠에 메말라가는 땅을 힘겹게 품고, 늙은 나무뿌리의 저열한 괴롭힘을 견디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안개에 덮여 전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안개는 정원이 지금까지 집어삼켜, 무한에 가깝도록 거대해진 외로움의 산물이자, 사람들을 대하는 정원의 몸가짐이다.


  나는 간절히 정원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그 꽃이 죽어버린 이후로 정원은 스스로 문을 닫아버렸다.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정원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정원이 자신의 의지로 문을 닫은 것임을 곧 알 수 있게 된다. 이 정원 안에는 또 다른 정원이 다섯 개나 있다. 닫힌 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릴 것 같지 않고, 문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나는 구차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을 두드린다.


  "질척거리는군요?"


  극장 관리인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한다. "네?"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뒤돌아본다. 턱수염을 뾰족하게 기른 남자다. "연극은 끝났어요. 오늘 공연은... 이런 망할 년 같으니, 후... " 깊은 한숨을 내쉰 후에 극장 관리인이 말을 이어간다. "오늘 공연은 그 년 때문에 망쳤지만, 그래도 끝난 건 끝난 거죠. 뭐 끝까지 보긴 본 거니 환불은 어렵습니다요." 그는 뾰족한 수염을 매만진다.


  정원의 화단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했나 보다. 극장 관리인의 말대로 공연은 이미 끝났고, 관객석에는 나만 혼자 남아있다. 아마 망친 공연에 대해 환불을 요구하려는 관객으로 오인한 것 같다.


"환불받으려는 생각은 없는데요?" 나는 말한다.

"그럼 다행이군요. 환불해줄 이유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으니 말이죠." 극장 관리인이 말한다.

"근데 질척거린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내가 묻는다.


  극장 관리인은 갑자기 무대 위로 올라서더니 나를 향해 -건성으로- 무릎을 꿇는다. 이어서 비아냥대는 말투로 대사를 읊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피비. 제발 나를 무시하지 마.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말만이라도 따뜻하게 해줘. 사람 죽이는 데 이골이 난 망나니라도 도끼를 내리칠 때에는 용서를 구한다고 하잖아. 그런데 넌 그 망나니보다 더 잔인해지려는 거야?"


"실비어스." 나는 짧게 말한다.

"빙고!" 극장 관리인이 씨익하고 웃는다.


  저건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 나오는 실비어스의 대사다. 극장 관리인이 나에게 다가오면서 말한다.


  "질척거린다고요! 실비어스처럼! 찌질하다고요! 실비어스처럼! 여자들이 제일 싫어한다고요! 아마 실베스터 스탤론보다도 더 싫어할걸?"

  극장 관리인이 정신이 나간 건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서 이 곳을 나가야 할 것 같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쳐 입고 가방을 주워 든다. 그때 어두컴컴한 대기실에서 누군가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 나온다. 아까 무대에서 뜻밖의 대사를 날려버린 그 여배우다. 극장 관리인은 여배우를 향해 연극배우 특유의 톤으로 말한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뾰족한 수염이 허공을 찔러대는 것 같다.


  "아름다운 피비, 제발 나를 동정해 줘."


  또다시 '뜻대로 하세요'의 대사다. 여배우는 다소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음 대사를 능숙하게 이어간다.


  "정말 미안해."

  "동정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어.  사랑을 동정해 준다면, 그래서 나를 사랑해 준다면, 너의 미안함과 나의 아픔이 사라질거야."

  "사랑해 줄게. 친구로서."

  "너를 갖고싶어."

  "실비어스. 지금까지는 네가 너무 미웠어. 날마다 사랑 이야기를 하는 네가 솔직히 귀찮았어. 하지만 참고 친구가 되어 줄게. 앞으론 부탁도 많이 할 거야. 하지만 부탁을 받는 것 이상으로 보답을 바라지는 마."


나를 사이에 두고 연극을 펼치는 그들 틈에서, 나는 서둘러 빠져나온다.


  "이봐! 자고 일어나면 많은 게 변해있을거야. 그래도 한결 나을 걸?" 극장 관리인이 나에게 소리친다. 나는 못 들은 척 무시한다. 무시해보려 하지만 혼란을 떨쳐낼 수 없다.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극장 밖은 춥고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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