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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키모자이크 Oct 29. 2020

<연재소설> 영원의 정원 / 제20장 시간의 연결고리

“하나는 감정을 향하고 하나는 욕망을 향한다.”

  나는 정원을 가꾼다. 물줄기가 골고루 퍼지도록, 물조리개를 좌우로 움직인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집중한다. 이따금 정원관리인이 찾아와 나를 칭찬해준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묻곤 한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뀐다. 꽃이 피고 진다. 크고 작은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대체로 행복하다고 느낀다. 

어느 날, 그 꽃을 발견한 것은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지난 10년 동안 늘 똑같이 물을 주며 지나치던 그 자리에 처음 보는 꽃 한 송이가 피어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이런 꽃이 피어날 리는 없다. 내가 그동안 알아채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정원 화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꿰고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몰랐던 것일까. 나의 자만심이 완벽을 무너뜨리고 경솔함을 낳은 것이다.


  그 꽃을 발견한 뒤로도 나는 똑같이 정원을 가꾼다. 물줄기가 골고루 퍼지도록, 물조리개를 좌우로 움직인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여전히 집중한다.

며칠이 지난 뒤, 아침에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부고(訃告)의 종.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대체 누가 죽은 것일까.


  나는 화단으로 정신없이 뛰어간다. 그리고 그 꽃이, 혼자만 죽어버린 것을 발견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뭔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밀려온다. 나는 꽃이 죽은 자리의 땅을 파낸다. 꽃의 뿌리를 잠식해버린 검붉은 뿌리가 보인다. 나는 그 뿌리를 따라 맨손으로 땅을 더 깊이 파낸다.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땅을 파낸 구덩이 안에서 내리막으로 향하는 통로 입구를 발견한다. 




  내리막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오자 눈 앞에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늙은 감나무는 어느 각도에서 보나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기묘한 형상이다.


“감히 여기까지 오다니, 퍽도 용감하군.” 늙은 감나무가 말한다. 

“식물과 대화하는 것은 오랜만인데?” 나는 의연한 척 대답한다. 두려움을 숨기려 애쓴다.

“자네가 감을 땄나?” 늙은 감나무가 묻는다.

“그런 기억은 없는데?” 내가 말한다.

“하긴.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균형은 이미 무너졌다.”

“무슨 균형을 말하는 거지?” 

“나의 뿌리는 이 세상의 모든 식물들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부족하거나 넘치는 존재들을 색출해서 열매로 만들고 손수 내 가지에 매달아 교수(絞首)형에 처한다. 그게 나의 사명이랄까. 나는 이 정원의 근원이자 중용(中庸)의 상징이지. 아니, 상징이었지.라고 해야 하나? 자네 덕분에 열매 한 개를 잃어버렸으니 말이야.”


  늙은 감나무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섭도록 일그러진다. 나는 반항할 겨를도 없이 늙은 감나무에게 사로잡혀 허공에 매달리게 된다. 늙은 감나무의 나뭇가지가 덩굴처럼 뻗어와 나의 팔다리와 목, 허리를 빙빙 둘러싼다. 감나무 줄기 하나가 내 배를 뚫고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 엄청나게 큰 감 한 개가 그 나무줄기에 매달려 있다.


“이렇게 생긴 감 본 적 있나?”

“본 적 없어.” 하고 내가 말한다.

“이건 감이 아니고 간이야. 방금 꺼낸 너의 간이지. 애가 탄다는 건 이런 의미야. 기분이 어때? 절박한가?”


  늙은 감나무는 손가락을 튕기듯 나뭇가지를 튕겨서 불꽃을 만들어낸다. 그 불꽃으로 나의 간을 태우기 시작한다. 나는 수십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그때마다 나뭇가지가 온몸을 비틀면서 조여 오는 바람에 의식을 잃을 수조차 없었다. 간신히 숨을 쉬며 매달려있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는 감정을 향하고 하나는 욕망을 향한다.”


  늙은 감나무의 나뭇가지 두 개가 화살처럼 나에게 날아온다. 나뭇가지 하나가 나의 심장에 박힌다. 또 다른 나뭇가지 하나는 나의 목구멍에 박힌다. 아득해지는 정신 너머로 늙은 감나무의 저주 섞인 음성이 들려온다.


“그 두 개의 나뭇가지는 정원 안에서만 존재한다. 다시 들어오면 너는, 죽는다.”


  2019년 여름이 끝나던 어느 날, 나는 늙은 감나무의 거친 줄기에 발목이 묶인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정원 밖으로 내던져진다. 




  나는 악몽을 꾼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만신창이가 되어있어야 할 내 몸에 상처라고는 단 한 개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감교수 한 사람뿐이다. 교수형에 처해진 감이라… 감교수가 그런 뜻이었다니.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감교수와 나는 평등하지 않은 관계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의 부조리함을 지적하기 위해 나는 그를 만나러 간다. 


  테라스가 있는 어느 술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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