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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키모자이크 Oct 28. 2020

<연재소설>영원의 정원 / 제17장 꽃의 정원

나는 이렇게 신과 만난다.

  깨진 거울 속으로 몸을 던진 나는 돼지우리 안에서 깨어난다. 잉위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작품이 즐비한 돼지우리다. 나는 늪에서 허덕이듯 돼지똥을 헤치고 가까스로 밖으로 나온다. 악취까치의 베스트프렌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냄새를 풍기면서.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돼지 한 마리가 다가온다. 이번에는 돼지와 대화를 하게 될 거라는 사실에 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긴 또 어디야?” 내가 묻는다.

“4번째 정원이라는.” 돼지가 말한다.

“그럼 넌 누구야?” 내가 다시 묻는다. 

“나는 ‘돼지세끼’라는. ‘새끼’가 아니고 ‘세끼’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하고 돼지가 말한다. 족발집에서나 보던 돼지 앞발을 나에게 내밀면서 발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네 개의 발가락 중 세 개를 펼친 건지 한 개를 접은 건지 잘 분간이 되질 않는다.


“돼지세끼?”

“그렇다는. 남들이 한 끼를 먹을 때 나는 세 끼만큼 먹어서 돼지세끼라는.”

“아. 그렇군.” 나는 이제 무언가를 복잡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돼지세끼’라는 이름을 가진 이 돼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나는 너에게 일을 시키러 왔다는. 그전에 몸을 좀 깨끗하게 하라는! 따라오라능!”


  나는 돼지세끼를 따라 공중목욕탕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목욕탕 안은 수증기로 자욱하다. 타일 바닥 곳곳에 금이 가거나 깨진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지저분하지는 않다. 무척 오랫동안 관리가 잘 돼온 장소인 것 같다. 나는 샤워기를 강하게 틀고 뜨거운 물에 한참 동안 몸을 씻는다. 손의 상처는 어느새 다 아물었다. 오물이 씻겨나가는 것을 보며 쾌감을 느낀다. 살면서 이렇게 깨끗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켜켜이 쌓인 수건 더미에서 수건 한 장을 집어 든다. 제일 먼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다. 수건에서 따뜻한 온도가 느껴진다. 아직도 햇빛을 머금고 있는 것일까. 

 옆에는 새 양말과 새 속옷이 돌돌 말린 채 놓여있고, 흰색 티셔츠와 파란색 점프슈트 한 벌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위에 메모지 한 장이 놓여있다. 나는 메모지를 들여다본다.


‘입으라는’


  나는 피식하고 웃는다. 돼지세끼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목욕탕 밖으로 나온 후에야 나는 아침이 밝은 것을 알게 된다. 눈 앞에 펼쳐진 오솔길을 따라 뭔가에 이끌리듯 나아간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오솔길의 끝에 다다르자 놀라운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누군가 꾸며놓은 꽃의 정원. 빨갛고 노란 튤립이 줄을 맞춰 숲 속 끝까지 이어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종탑이 서있다. 종탑 뒤에서 작은 소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소녀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머리가 하얗게 셌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다. 소녀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거리를 재면서 총총 다가온다. 손에는 커다란 조개껍데기를 들고 있다. 뒤따라 주근새가 긴 다리를 뽐내며 걸어 나온다. 어찌 된 일인지 주근새의 얼굴에 주근깨가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곧이어 악취까치가 걸어 나온다. 이번에도 어찌 된 일인지 아무런 악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잉위도 뒤따라서 걸어 나온다. 잉위는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있다. 그 기저귀는 일종의 신뢰감 같은 것을 발산하고 있다. “이곳에 똥 쌀 일은 아마 절대 없을 것이다.” 하고 잉위가 웃으며 말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마’와 ‘절대’의 간극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소녀가 건넨 조개껍데기 안에서 메모를 발견한다.


“정원에 물 주라는”


  나는 다시 한번 피식하고 웃는다. 종탑에서 종소리가 네 번 울리자 소녀와 주근새, 악취까치와 잉어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나는 늙어버린 소녀와 주근깨 없는 주근새, 악취를 풍기지 않는 악취까치, 똥을 싸지 않는 잉위를 차례로 생각한다.


  “정원에 물 주라는 얘기 못 들었나요?” 하고 종탑 안에서 누군가 말한다. 나는 그에게 다가간다. 그는 종탑 도르래에 매달린 손잡이를 머리 위로 높게 묶어 놓는다. 종탑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실눈을 뜬다. 남자는 매의 눈을 하고 있다. 머리 위에 특이한 원반을 얹고 있다.


  나는 이렇게 신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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