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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키모자이크 Oct 26. 2020

<연재소설>영원의 정원 / 제15장 확신 없는 기로에서

나는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철컹” 


  나는 다섯 번째 정원 안으로 천천히 들어선다. 누군가 첼로로 연주하는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반복해서 흐른다. 고풍스러운 모양의 분수대에 물이 흐르고 있다. 나는 분수대에 가까이 다가선다. 향긋한 꽃냄새가 가득하다. 손을 적시고 물을 받아 입을 축인다. 나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맛에 깜짝 놀라 주저앉아 버린다. 이미 밤이 깊은 데다 주변이 어두워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탓이다. 이 분수대에는 물이 아니라 와인이 흐른다. 감격에 젖기도 전에 혀를 감싸는 떫은맛이 정신을 일깨워준다.


  “왜, 떫어?” 하고 말하던 감교수가 떠오른다. 그가 어떤 존재였는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의 죽음을 나는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 정원을 둘러보는 동안 같은 음악이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지만,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이대로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까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분수대 위로 달의 물결이 흐른다. 어디선가 날아든 나방 한 마리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처럼 분수대 뒤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보다는 느리고 기억보다는 빠른 움직임이다. 잔상을 남길 듯 움직이지만, 지나간 자리에는 물거품만 남아있다. 곧이어 또각또각 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여인이 다가온다. 그녀는 빨간색 스웨터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다. 나는 그녀의 스웨터에 붙은 머리카락 한 개를 뗀다. 머리카락은 금세 잔디로 변한다.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이집트 왕실의 음악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차디찬 석실에서 나와 함께 죽어가던 여인의 숨결을 느낀다. 단발머리 소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온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상처를 내던 잔디밭이 눈 앞에 펼쳐진다. 대상도 없는 그리움이 나를 흐느끼게 만든다. 나는 왜 여기에 있으며,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사랑한 것일까. 


  나는 여기가 고통의 마지막 지점인 것을 직감한다. 아무런 확신도 없는 기로에 서서, 나는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고 하더라도 영혼만큼은 가져갈 수 없어요.” 하고 이번엔 내가 말한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조금 비틀거리다가 침대에 모로 눕는다. 그녀는 이불 대신 외로움을 덮는다. 외로움이 안개가 되어 정원에 드리운다.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입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느낀다. 가슴팍에서도 피가 흐른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기엔 너무 슬프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각주

*독일어로 환상, 공상, 꿈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곡.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만든 13개의 피아노 소품으로 된 ‘어린이 정경’의 7번째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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