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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키모자이크 Oct 29. 2020

<연재소설> 영원의 정원 / 마지막장

나는 새싹의 주변으로 흙을 모아준다.

  누군가 첼로로 연주하던 트로이메라이가 어느새 피아노 연주로 바뀌어있다. 

어쩌면 여전히 첼로 연주일 수도 있다. 내가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일 수도. 나는 소매로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는다.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다. 어차피 다시 피로 더러워질 입, 괜히 소매만 더럽혔네. 하고 생각한다. 가슴팍에서 흐르는 피는 와인이 흐르던 분수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시 들어오면 죽는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어느샌가 가지를 뻗어온 늙은 감나무가 말한다. 

“여기가 내 무덤 아니었나?” 나는 힘겹게 말한다.

“그나저나 용케 다시 들어왔군. 감꼭지를 머리에 쓰고서 말이야.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나도 이제 늙었군.” 하고 늙은 감나무가 말한다.

“너는 원래 늙었었어.” 내가 말한다.

“아직도 감정이 남아있나? 아니면 아직도 욕망이 꿈틀대나?”

“곧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질문 아니야? 좀 닥치라고.” 나는 풀썩 주저앉는다.


  정원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발밑에서 물안개가 희미하게 피어오른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머리에 원반을 얹고 있는 걸 보니 정원관리인이다. 아직도 저 코스프레라니. 할로윈이 지난 지가 언제인데.


“기분이 어떤가? 이번 생은 조금 특이했다고.” 정원관리인이 말한다.

“이번 생? 그만둬요. 그 못 알아듣는 소리 좀.” 내가 말한다.

“거의 다 왔어.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정원관리인이 묻는다.

“당신, 아버지가 보낸 거 아니죠? 난 알고 있었어.” 내가 말한다.

“그래 제법이군.” 정원관리인이 말한다.


  나는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는다. 땅바닥이 꿈틀거리는 듯한 착시가 일어난다. 죽는 건 이런 기분이군. 하고 생각한다. 잠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런데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처럼. 아까보다 비가 조금 더 굵어진 느낌이 든다. 누군가 또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수염을 뾰족하게 기른 남자다.


“저 흉물스러운 나무 좀 어떻게 해봐” 정원관리인이 뾰족수염에게 말한다.

“다음 생에서 안 쓸 거예요?” 뾰족수염이 말한다.

“무대 소품 치고는 너무 거추장스럽잖아.” 정원관리인이 말한다.

“그렇긴 해요. 근데 누구 아이디어였더라.” 뾰족수염이 말한다.


  나는 저들의 대화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도 저 나무 좀 어떻게 해보라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뾰족수염이 허리춤에서 커다란 칼을 꺼내들더니 늙은 감나무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친다. “비율도 안 맞는 주제에! 균형도 안 맞는 주제에!” 하면서 뾰족수염이 씩씩거린다. 늙은 감나무는 순식간에 땔감으로 변해버린다. 저렇게 연약한 존재였나. 나는 얼마나 더 연약한가. 하고 생각하며 죽음을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떨궜을 때, 나는 아까 꿈틀대던 땅바닥에서 피어오른 새싹을 발견한다. 나는 새싹의 주변으로 흙을 모아준다. 새싹이 화답하듯 떡잎을 흔들더니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자라기 시작한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요동친다. 새싹은 순식간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목질화한다. 가지가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한다.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가지 몇 개가 내 몸을 감싼다. 가지는 곧 내 목구멍 속으로, 내 심장 속으로 파고든다. 늙은 감나무의 그것과는 다르다. 몸이 따뜻해지면서 상처가 아물고 다시 뜨거운 피가 도는 것을 나는 느낀다. 새싹은 정원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자라나 금세 커다란 나무가 된다. 친절하게 손짓하는 모양으로 나에게 가지를 뻗더니 열매를 하나 내민다. 열매가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점점 커지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난다. 열매가 흰 셔츠를 입고 다가온다.


  “안녕! 또 뵙겠습니다. 반가워!”


  존댓말과 반말을 섞었을 때 눈물이 나기도 하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한다.


  정원관리인은 동상처럼 서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원반에 금이 간 것이 보인다. 그는 더 이상 매의 눈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꼭 잉위를 닮았다. 하늘로 치솟던 거대한 나무줄기가 지면을 뚫고 들어갈 기세로 돌진해온다. 줄기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동상을 짓이기더니, 그 잔해를 바닥에 골고루 펴바른다. 

  뾰족수염은 놀란 얼굴을 한 채 하늘 위로 날아가버렸다. (믿기 힘들겠지만.)


“또 발라버렸군요. 맘에 들어?” 열매가 말한다. 


  나는 열매의 부축을 받으며 정원을 빠져나온다. 비가 더 굵어지면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을 사서 쓸 것이다. 그리고 정원은 그대로 비에 젖을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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