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쇤 Jun 11. 2023

퇴사를 했습니다.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 

지난주 금요일을 마지막으로 3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다. 정확히 세어보니 3년 7개월 하고도 20일이나 근무했더라. 


기업을 위한 디지털 마케팅 솔루션을 만드는 이 스타트업은 내가 마케터라는 적성을 찾고, 온라인 광고부터 오프라인 광고, 이벤트, 웹사이트까지 다양한 마케팅의 범주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고마운 회사였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는 나였지만, 믿고 기회를 준 대표님 덕에 남들보다 일찍 중간 관리자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일과 사람에 대한 고민을 끝없이 해야만 하는 자리였기에 압축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었고 서투른 팀장으로서 했던 각종 고민과, 이를 통해 얻었던 깨달음을 솔직하게 풀어낸 책을 작업하면서 '내 이름으로 책 출간하기'이라는 인생 목표를 생각보다 일찍 달성하기도 했다.


안정보다는 도전을 즐기고, 무엇이든 오래 하면 금방 실증을 느끼는 성향이라 처음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1년 다니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이 편해지고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신기하게 직무의 변화, 주변 동료의 입·퇴사 등 챌린지들이 찾아왔고, 이러한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일하다 보니 어느새 3년 7개월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쌓였다(근속 연수가 긴 대기업, 공기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사이 회사도 많이 성장했다. 내가 입사했을 때 이제 막 시리즈 A 투자를 받은 상태였는데, 작년에는 어엿히 시리즈 B 투자를 유치한 회사가 되었다. 20명 미만이었던 직원 수는 어느새 70명을 바라보는 숫자가 되었다. 예전에는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 회사를 소개할 때마다 우리가 만드는 솔루션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해야 하는 나름의 고충이 있었는데, 이제는 이름만 말해도 대부분 아는 정도로 업계에서는 꽤나 유명한 회사가 되었다. 


헤어질 결심


똑같은 업무만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하며, 배울 점이 계속 생겼기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반대로 배울 점이 더 이상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직접적인 퇴사의 동기가 되었다. 


어느새 편안한 관계와 편안한 업무에 너무 익숙해진 나 자신을 발견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안정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성장하기를 갈망하고, 다양한 도전을 즐기는 나는 ‘이제는 회사를 떠날 때’라는 신호로 감지했다.   

 

새로운 직원이 들어와서 특유의 열정과 신선한 관점으로 기존 마케팅과 웹사이트의 개선점을 찾고, 신규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 어느 순간부터 "그거 전에 해봤는데, 잘 안 되었어요"라고 시니컬하게 반응이 툭 튀어나왔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한 변화를 적극 받아들이기보다 거부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을 때 스스로가 고인 물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3년이 넘는 근무 기간 동안 차곡차곡 레거시(legacy)가 쌓일수록, 오히려 성장은 정체되고 도전 자체가 점점 힘들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지 불안해졌다. 


사실 3년 넘게 한 회사를 다니면서 퇴사 생각을 한 건 당연히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년 전에 번아웃이 쎄게 왔던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질질 늘어지던 웹사이트 개편 프로젝트로 너무 지쳐있었고, 몇몇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했었다. 때마침 이직 제안을 먼저 준 회사들과 커피챗을 하면서 탈출각을 쟀다. 


처음에는 너무 지쳐서 감정적으로 '퇴사'를 떠올렸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할수록 다른 좋은 선택지가 있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다른 곳으로 이직하는 거면 몰라도 이렇게 그저 회사가 싫다는 이유로 도망치듯 떠나는 건 내 커리어에 오점을 남길 것 같았다. 힘들다고 한 번 도망쳐버리면, 그 후 무수히 찾아올 힘든 순간마다 퇴사병이 발병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긴 고민 끝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정말 타이밍 좋게 나를 힘들게 했던 조직 내의 상황이 해결되고, 업무의 변화를 맞이하면서 남아있기로 한 그때의 내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선택의 기준 


만 3년이 지난 시점, 더 늦기 전에 안정적으로 나를 지켜줬던 Comfort Zone을 벗어나기 위한 이직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Where next? 에 대한 목표는 명확했다. 현재 회사보다 규모가 크고,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정도로 인지도 있는 회사로 가는 것. 


이는 내가 회사를 바라보는 기준에 어느 정도 지각 변동이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그동안 내가 맡은 업무의 재미, 자유도, 임팩트가 중요하지 외부에서 바라보는 인지도나 매출 등의 규모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뮤니티 활동을 하거나, SNS에서 e-지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느낀 점은 회사의 후광 효과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제야 깨달았다). 어떻게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과 얼굴을 아는 정도로 나에 대해 파악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내가 속한 회사를 기준으로 평가하게 될 수밖에 없다. 마트에 가면 신선 식품 코너에 있는 여러 우유들 중에서 이름 없는 브랜드의 우유보다 서울우유의 우유가 더 맛있을 거라고 0.01초 만에 자동 인식하는 것처럼.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탄탄하게 실무 경험을 쌓았으니, 이제는 나라는 사람에 화려한 옷이라는 아이템을 추가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규모가 큰 조직에 가면 필연 다양한 사람들도 있을 터. 업그레이드된 다이내믹 속에서 한층 다른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새로운 시작


얼마 전 읽었던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그만두는 것'에 대한 문장을 만났다. 


진정한 여행을 통해 우리는 근본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내 안의 뭔가를 그만두어야만, 뭔가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약 4개월 동안 몇 번의 지원과 탈락을 거쳐, 지인에게 추천 받은 판교에 있는 회사로 이직이 결정되었다. 막상 익숙했던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낯선 환경에서 새 출발을 하려고 하니 두려움이 든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것보다 '변화'를 갈망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를 그만두어야만 한다. 한동안 균형을 잃겠지만, 더 큰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내게 다가오는 고통을 감수할 것이다.


그만둔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다음으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뭔가가 당신을 수긍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뭔가에 수긍할 수 없어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불평불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선택이고 인생 여정의 종착역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걸음이다. 직장이든 습관이든, 그만둔다는 것은 꿈을 향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아름다운 선회다. -'타이탄의 도구들' 중에서-

Photo by Roth Melinda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방법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