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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피아노 Oct 03. 2023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피아노와 사랑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던 그때에도 잘 자고 잘 먹고 잘 웃고 빨래를 열심히 하고 내 삼시 세끼를 걱정하던 20대 중반의 그의 모습을 가끔 생각한다. 그 시절의 나도 내 앞에 놓인 일들로 매일이 벅차 가시나무의 가사처럼 그 누구도 쉴 곳이 내 속에 없었다.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그는 매일 힘을 내 나를 열심히 사랑하는지 고맙기도 하고 묘한 질투심도 났다.    


사랑을 많이 해봐야 음악이 깊어진다는 말을 중학생 때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나는 그럴 시간에 연습이나 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진짜 그럴까 생각하며 사랑을 동경했다. 라 로슈푸코는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드라마에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들었다. 하지만 나는 여자 주인공처럼 예쁘지 않았고 남자 주인공처럼 생긴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는 김연우의 노래에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랑한다는 흔한 말 한 번도 해주지 못해서   

    혼자 서운한 마음에 지쳐서 숨어버렸니

    심장이 멎을 듯 아파 너 없이 난 살 수 없을 것 같아


심장이 멎을 것처럼 아프고 너 없이는 살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데 왜 노래 주인공은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을 못 해줬을까. 이렇게 절실하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면 굳이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도 사랑이 느껴졌을 법도 한데 상대방은 그 말을 못 들어서 서운해서 숨고 떠나버렸다.   


어릴 때부터 다닌 교회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사랑한다고 말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곧 사랑이라 했다. 사춘기 시절 단짝과 매일 같이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모든 편지의 마무리는 사랑해, 러뷰, 알러뷰 등의 글씨와 함께 하트를 최대한 예쁘게 그렸다. 손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쉽게 썼지만 어쩐지 입 밖으로 하는 건 영 어색했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소리 내어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사랑을 많이 해봐야 음악이 깊어진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다른 이들의 연주를 듣다가 알게 됐다. 들었던 수많은 연주 중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는 연주에는 정말 사랑이 있었다. 실수해서 사람들이 우습게 보면 어떡하지 같은 마음이나 내 기교를 화려하게 뽐내고 싶은 마음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연주는 어떠한가. 당연한 말이지만 무대에 서면 긴장이 되고, 긴장이 되면 내 현재 상태에 지나치게 예민해진다. 몸의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고 심장 박동과 호흡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평소 같으면 무시해 버리고 금세 잊어버릴 생각이 이때는 너무나 쉽게 각인되어 잘 떠나가지 않는다. 이 생각이 근사한 생각이라면 참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날 우습게 보면 어떡하지 같이 부끄러운 걱정, 그러면서도 나의 잘남을 뽐내고 싶다는 오만함과 같은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음악이, 음악을 듣는 이들이, 사랑이 쉴 곳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나는 내 속에 나를 줄여 다른 사람이 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런 사람이 되면 나도 사랑이 많은 그들의 연주와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면서 속해본 모든 집단에는 그중에서 가장 사랑이 많은 사랑스러운 사람이 항상 있었다. 장기 이식 하듯 그들의 사랑을 내 몸에 이식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헛된 바람의 동기 또한 지극히 이기적이니 나는 아직 멀었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그는 이제 내 빨래까지 하느라 양이 많이 늘었는데도 여전히 빨래에 열심이다. 그의 사랑은 무엇일까. 내가 요즘 어떤 곡을 연습하고 있는지, 온라인 세상의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같은 것들에 그는 별로 관심 없다. 내 연주가 혹시 별로일까 봐 불안할 때나 인터넷에 흩뿌려놓은 나의 조각들이 괜스레 우습게 느껴질 때도 그와 있으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돼버린다. 


연주 전날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수육을 삶아주고 김치찌개를 끓여준다. 연주가 끝난 후에는 내가 보고 싶다 말했던 영화를 같이 본다. 고양이 두부와 후추는 우리 둘 몸에 머리를 열심히 비비다가 식빵 자세로 잠이 든다.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데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다. 


그에게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직도 영 어색하다. 내일은 그의 조각보다 그를 더 사랑하자 오늘도 다짐만 하다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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