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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이미 들이치는데, 회의는 계속되고 있다

AI는 묻지 않는다. “준비되셨나요?”

by 우리도 처음이라


엑셀이나 워드를 마지막으로 열어본 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요즘은 문서를 쓰기도 전에 ChatGPT가 먼저 초안을 띄운다. 이제는 어떻게 쓸지 보다, 어떻게 고쳐야 할지를 더 자주 고민하게 됐다.


변화는 예고 없이 몰아치는 파도처럼 다가왔다. 처음엔 발끝을 적시던 물이 어느새 무릎까지 차올랐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허리 깊숙이 잠겨 있었다. 비교적 빠르게 따라가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도, 어느 순간 숨이 찼다. 변화는 이미 속도를 내고 있었고 그 안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조직 안에서 쉽게 멈춰버린다. 회의는 여전히 길고, 문서 양식 하나 바꾸는 데도 수차례 승인을 거쳐야 한다. '디지털 전환'이라는 말을 반복하지만, 그 말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조직이 정말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변화는 숨 가쁘고, 조직은 느긋하다.


IDC는 국내 기업의 72%가 생성형 AI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대한상공회의소의 조사에 따르면 절반 가까운 기업이 AI 도입 계획조차 없다고 한다. 공식은 멈춰 있고, 비공식은 조용히 작동한다. 조직이 가만히 있는 사이, 그 안의 개인들은 이미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ChatGPT에게 기획 아이디어를 묻고, 메일 요약을 맡기고, 새로 등장한 베타 기능을 눌러보는 사람들. 그런 작고 사적인 시도들이 모여 어느새 일하는 감각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경쟁력은 거창한 시스템이 아니라, 그런 변화에 먼저 손을 뻗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작은 움직임들은 조직이라는 구조 속에서 종종 무력해진다. 새롭다는 이유로, 낯설다는 이유로, 때론 보안을 명목으로. 외부 도구는 금지되고, 내재화라는 이름으로 몇 달 전 모델 기반의 솔루션이 도입된다. 하지만 ChatGPT, Gemini 같은 최신 모델들이 몇 주 단위로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시대에, 몇 달 전의 기술은 이미 한참 뒤처진 것처럼 느껴진다. 기술보다 더 느린 것은 그 기술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래서 변화는 조직보다 개인에게서 먼저 온다. 무언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멈추는 경우가 더 많다. 모든 걸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한 번쯤 직접 써보는 일. 별것 없더라도, 별것 없다는 걸 스스로 느껴보는 일. 그런 태도에서 질문이 생기고, 질문에서 다음 행동이 시작된다.


준비되셨나요?


조직은 늘 '준비 중'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 준비는 늘 늦는다. 그리고 AI는 그런 걸 묻지 않는다. "준비되셨나요?" 같은 질문 없이, 그저 조용히 아주 빠르게 앞서간다.


그래서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누군가의 승인을 기다리며 멈춰 서 있는가, 아니면 아주 작게라도 먼저 움직여본 사람인가.


지금은 아직 괴리감이 더 크다. 하지만 그 간극을 가장 먼저 느낀 사람이, 나중에 조직이 진짜로 변할 때 가장 먼저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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