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은 자동화되고, Vibe는 방향이 되었다
막연한 이미지, 설명되지 않는 어조, 손에 잡히지 않는 방향 같은 것을 붙잡기 위해 AI를 켜고 몇 개의 단어를 던져본다. 그러면 마치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정돈된 결과가 돌아온다. 빠르고 그럴듯하다. 그런데도 가끔 결과가 너무 매끄러울수록 더 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답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가 정말 맞았는지 되묻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건 결과보다 앞서 있었던 의도다. 감각은 결과 이전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 이후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 AI가 제안하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방향과 어긋나는 미묘한 차이를 조심스럽게 더듬는 일. 그 작은 틈 안에 스스로의 기준이 남는다.
필터월드(Filterworld)
:알고리즘이 취향과 문화를 조율하는 시대
- Kyle Chayka
의도를 세운다는 건 단지 선택지를 고른다는 뜻만은 아니다. 의도를 명확히 전달할수록 AI는 더 정교한 결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결과가 지나치게 잘 맞을수록 질문은 사라진다. 더 묻지 않아도 될 만큼 매끄럽게 완성된 답 앞에서 어떤 문제의식으로 시작했는지를 잊게 된다.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그 안에서 실제로 선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헷갈려진다. 선택지가 많다는 건 오히려 혼란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선택들은 사실 처음부터 다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고른 것이 아니라 고르게 된 것. 이것이 알고리즘이 만든 평균의 세계 필터월드(Filterworld)다.
겉으로는 다양하지만 안으로는 점점 닮아가는 흐름. 다양한 선택지를 주는 듯하지만 실은 모두 비슷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익숙하고 무난한 형식이 잘 팔리는 기준이 되고 개인의 관점은 점점 더 유사해진다. 정교한 추천은 반복될수록 예측 가능성을 높이지만 그 속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감각은 조금씩 약해진다.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데 익숙해질수록 스스로의 기준은 희미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흐름은 질문의 대상이 아닌 전제가 된다.
더 큰 문제는 그 결과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생성형 AI는 사용자의 선택을 학습하고 사람은 그 결과에 익숙해지며 점점 그 흐름에 맞춰 반응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조율하는 루프는 결국 공진화(Co-evolution)의 구조를 만든다. 그리고 그 구조는 기준을 자신에서 점점 바깥으로 옮기게 만든다. 스스로의 감각이 아니라 시스템이 제공한 흐름 속에서 방향을 잡게 되는 것. 그 익숙함이 반복될수록 질문은 사라지고 선택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의도적 마찰(Intentional Friction)
- 불편을 설계해 행동을 유도하는 전략
그래서 속도를 늦춰보기로 했다. AI가 제안하는 결과 앞에서 한 박자 쉬어가는 일. 그 결과가 본래의 문제의식과 어긋나지 않는지 그 안에 담긴 방향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 가볍게라도 점검해 보는 일. 이런 성찰적 주의를 누군가는 의도적 마찰(Intentional Friction)이라 불렀다.
정답이 자동화된 시대에 결국 남는 건 정답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설계의 의도다. 정서적 흐름조차 외부에 의해 설계되는 시대, 기준과 리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감각과 언어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향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가 바로 그 물음에 닿아 있다.
Vibe의 시대
그래서 지금은 Vibe의 시대다. Vibe는 더 이상 감정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의도를 설계하고 방향을 언어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질문을 어떻게 구성할지 어떤 맥락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사고방식. 생성형 AI와 함께 일하는 시대 이 Vibe는 정답보다 앞서는 경쟁력이다.
비슷한 프롬프트라도 어떤 방향과 구조로 설계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흐름이 만들어진다. Vibe는 말투가 아니라 의도 설계의 역량이며 사고와 언어의 선택을 통해 드러나는 주도성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나만의 Vibe를 인식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자동화된 결과에 쓸려가지 않기 위해 방향을 꾸준히 점검하고 질문을 스스로 구성하고 자신의 언어 구조를 끝까지 붙드는 일. 그것이 지금 시대의 감각이고 경쟁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