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PANIC, 정답이 아닌 여정을 택하는 시작점
오랫동안 완벽함은 능력의 증표처럼 여겨졌다.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더 실수 없이. 그것은 곧 전문성의 이름이었고, 개인의 경쟁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완벽함조차 자동화된다. AI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정밀함과 효율성을 손쉽게 구현하고, 수년의 시행착오로 축적된 숙련까지 누구나 몇 번의 클릭으로 불러올 수 있는 시대. 반복적인 일일수록 인간은 점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완벽은 더 이상 차별화의 기준이 아니다. 숙련된 능력이 보편화될수록, 그 안에서 기여할 수 있는 고유한 지점은 흐려져간다. 이런 흐름 속에서, 어느 순간 질문이 떠오른다. 지금, 어디에서 다시 나만의 가치를 시작할 수 있을까.
DON’T PANIC
그때 문득 한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일상의 우주적 혼란을 유쾌하게 비트는 이 영화는, 얼마나 쉽게 우리는 정답에 안주하고 질문을 잃어버리는지를 보여준다. 삶과 우주, 모든 것에 대한 궁극의 해답으로 슈퍼컴퓨터는 '42'라는 숫자를 제시하지만, 정작 어떤 질문을 위한 답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말한다. "DON’T PANIC" 이해할 수 없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항해를 멈추지 말 것.
그 메시지는 지금의 시대와 겹쳐진다. AI가 대부분의 정답을 대신 말해주는 지금, 진짜 중요한 것은 여전히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AI 시대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아닐까.
히치하이커(Hitchhiker): 꼽사리 여행자
히치하이커. 말 그대로라면, 누군가의 여정에 꼽사리 낀 여행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은유는 단순한 무임승차가 아니다. 최소한의 짐만을 든 채, 예측 불가능한 우주에 뛰어들어 스스로 감각과 방향을 만들어가는 태도다. 던져진 상황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재치와 적응력으로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가는 사람. 고정관념이라는 최소한의 짐만을 들고, 예상 밖의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으로 여정을 택하는 존재.
그 모습은 예측 가능성과 통제 속에서 가치를 찾던 과거의 '효율적인 도구'로서의 자아상과는 전혀 다르다.
니체는 말했다. “그대의 정신이라는 단단한 돌덩이에서 그대의 이상적인 자아를 조형하라.” 자신이 되어간다는 건, 이미 정해진 자아를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조용히 깎고, 조금씩 다듬어가는 조형의 과정이다.
기계가 도구와 결과를 책임진다면, 인간은 감각과 질문을 품을 수 있다. 정확한 성과보다, 무엇에 반응하고 어디서 멈추는지, 어떤 감각이 깨어나는지를 지켜보는 일.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실험은 그런 것일지 모른다.
이는 단순한 역할의 변화가 아니다. 외부의 목적에 맞춰 움직이던 방식에서, 이제는 자신만의 리듬을 만드는 쪽으로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 세상을 '내 식대로' 바라보고, 감각을 따라가며 정답도, 마침표도 없이 천천히 조율해 보는 일.
다만 확실한 건, 질문이 계속되는 한 이 여정도 계속될 거라는 것이다.
AI 히치하이커로서의 첫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