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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지 않아도 괜찮은가

속도를 내려놓자, 틈이 생겼다

by 우리도 처음이라


요약 시스템부터 코드 보조 도구, 번역과 정리 기능까지. 다양한 AI 기반 도구들이 업무 흐름 곳곳에 스며들면서, 기술 검토 문서를 작성하는 일도 훨씬 간결해졌다. 필요한 정보는 이미 정돈돼 있었고, 문장 구조도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일은 끝까지 내 손으로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도구가 먼저 나서서 정리해 주는 장면이 낯설지 않다. 처음엔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지만, 어느새 그 변화가 불편하지 않게 느껴졌다. 빠르게 지나가는 흐름 속에서 익숙해진다는 건,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익숙함은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새롭게 정돈된 기준처럼 다가왔다.


속도에서 한 발 물러섰을 때


속도를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그 안에 다른 질문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효율이 아닌 방향, 반복이 아닌 의미. 빠르지 않아도 괜찮을지에 대한 실험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개인의 경쟁력은 이제 깊이 있는 사고, 창의적 통찰, 윤리적 판단, 복합적인 문제 해결 능력 같은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더 이상 정보를 얼마나 빠르게 처리하느냐보다, 그 정보들 사이의 맥락을 어떻게 잇고 어떤 의미를 끌어내느냐가 중요해졌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에서 ‘의도를 연결하는 사람’으로, 역할의 정의가 바뀌는 중이다.


AI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대신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정리나 요약뿐 아니라, 전략을 수립하고 목적을 정의하는 일까지 일부 영역에서 가능해졌다. 최근 공개된 AlphaEvolve의 사례만 봐도, 인간이 설정한 목표를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문제의 구조를 다시 해석하고 최적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런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인간의 일이고 어디부터가 기술의 일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그래서 더 중요한 건, 인간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가다. 어떤 질문을 계속 품을 수 있는가, 무엇을 여전히 의심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질문을 만들고, 질문에 머무르는 감각. 그것이 아직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영역이라면, 그 감각은 더욱 세심하게 다듬어야 한다.


깊게 몰입할 이유, 넓게 확장할 가능성


몰입의 방식도 바뀌고 있다. 칼 뉴포트는 ‘딥 워크(Deep Work)’라는 개념을 통해, 방해 없이 인지적으로 어려운 작업에 집중하는 능력이 점점 더 귀해질 것이라 말했다. 이 개념은 10년도 더 전에 나왔지만, 지금처럼 AI가 판단과 정리를 대신해 주는 시대에 오히려 다시 조명받고 있다. 자동화가 늘어날수록 깊은 사고는 더 드물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더 가치 있는 역량이 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깊은 몰입은 더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속도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된다는 걸, 조금씩 실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시간이 일을 따라 흘렀던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생각이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조금씩 생겨났다. 단순한 쉼이라기보다는, 사유의 공간이 열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기술을 단순한 도구로만 여기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확장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능력을 넓히는 존재로서의 ‘증강된 인간(augmented human)’이라는 개념은, 기술이 능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사고의 여지를 더 깊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직접 하지 않아도, 그만큼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감각. 그건 능력의 축소가 아니라, 방향의 재배치다.


틈에 머무는 연습


글쓰기는 요즘, 생각을 오래 붙잡아두기 위한 조용한 실험이 되고 있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기 위해서. 사고의 리듬을 회복하려는 이 느린 방식은, 무엇을 향해 집중하고 있는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지를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예전 같았으면 한 생각이 펼쳐지다가도, 정확한 개념이나 정의가 떠오르지 않아 검색을 하다 보면 흐름이 끊기고 감각은 흐려진 채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중간 단계를 기술이 채워준다. 부족한 조각은 도구가 메우고, 생각의 결은 흐트러지지 않은 채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그 느림은 생각이 사라지지 않게 붙잡아주었고, 그 틈에서 무엇을 더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지를 알게 된다.


빠르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 빠름이 곧 가치로 이어지는 시대는 이미 지나고 있다. 얼마나 빠른가 보다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사람은 조금 느리게 사고하고 천천히 결정할 수 있다. 오히려 그 느림 속에서만 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기술은 앞으로도 더 유능해질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전환되고 있다는 것. 어쩌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속도를 내려놓은 자리에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준은 누구보다 먼저가 아니라, 누구보다 깊게 생각한 사람만이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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