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식탁, 그 아래 감춰진 이야기

추수감사절: 감사와 애도 사이

by 김현정

세계 어느 곳이나 가을의 풍경은 비슷하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풍성한 먹거리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 풍요롭다. 풍요의 절정을 상징하는 날이 추석이다.


추석을 영어로 번역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옛날에는 “Full Moon Day(보름달이 뜨는 날)”, “Korean Thanksgiving Day(한국식 추수감사절)”외국인들이 설명만 봐도 무슨 날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하는 게 대세였다. 그러나 이제 나날이 높아지는 K 파워 덕인지 그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인지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이더라도 그냥 발음 그대로 “Chuseok”이라고 적는 편이 가장 근사해 보인다.



Thanksgiving Day, 미국식 추석

언젠가 한국 문화가 더욱 널리 퍼져 추수감사절을 “American Chuseok(미국식 추석)”이라고 번역할 날이 올 수도 있을까?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이 추석 연휴. 그중에서 ‘연휴’가 영어로 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이 ‘holiday’라고 답할 테다.


물론 정답이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미국인들은 연휴를 ‘long weekend’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7월 4일 독립기념일같이 특정한 날짜를 공휴일로 지정하면 주중에 덜렁 하루만 쉬게 될 수 있다. 그러나, 1971년, 미국 정부는 주말에 공휴일을 더해 국민들이 좀 더 여유롭게 연휴를 즐길 수 있도록 특정한 시기의 월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월요일 공휴일법(Uniform Monday Holiday Act)’을 통과시켰다. 이런 정책 덕에 일 년에 몇 번씩 주말에 월요일까지 더해진 긴 주말을 즐길 수 있게 됐고, ‘long weekend’라는 표현이 곧 연휴를 뜻하게 됐다.



대체 공휴일=Observed Holiday

한국의 추석 풍경은 올해 유난히 여유롭다. 10월 3일부터 10월 9일까지 공식 연휴 기간이 긴데다 10월 10일 하루만 더 휴가를 내면 무려 열흘의 긴 휴가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2025년 추석 연휴가 이렇게 길어진 데는 10월 8일 대체 휴일의 힘이 크다. 꿀 같은 공휴일이 어차피 쉬게 돼 있는 주말에 떨어지면 왠지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든다. 이런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정부는 대체 휴일을 제안한다.


공휴일과 주말이 겹친 탓에 날려버린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정부가 제안한 대체 휴일영어‘observed holiday’라고 부른다.


(TMI: ‘observed holiday’의 ‘observed’의 기본형은 ‘observe’다. 여기서 ‘observe’는 흔히 사용되는 ‘관찰하다’의 의미로 사용됐다기보다 ‘기념하다’ 혹은 ‘축하하다’ 의 의미로 활용됐다고 봐야 옳다. 대체 휴일은 ‘substitute holiday’, ‘bonus holiday’, ‘make-up holiday’ 등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같은 날, 다른 관점: 추수감사절 vs. 국가 애도의 날

그런데 특이하게도 미국추수감사절11월 넷째 주 목요일이다. 월요일 공휴일법에 따라 월요일에 휴일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나 독립기념일같이 특정한 날짜를 휴일로 삼는 것도 아니다.


(TMI. 캐나다의 추수감사절은 10월 둘째 주 월요일이다. 미국보다 한 달 이상 이른 셈이다. 미국보다 북쪽에 위치한 탓에 수확 시기가 빨라 추수감사절도 그만큼 빨라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6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서 영국에서 건너온 개척자들과 원주민들이 가을 추수를 끝낸 후 함께 만찬을 즐겼다. 이날의 식사는 개척자와 원주민 간의 우정과 협력을 상징하고 풍요로운 수확을 허락해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추수감사절의 시발점이 됐다. 이후 링컨 대통령의 승인으로 11월 넷째 주 목요일이 미국의 추수감사절로 자리 잡았다.


2021년 11월 25일,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서 국가 애도의 날을 기념해 행진하는 사람들의 모습. Getty Images/Bryan R. Smith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대표적인 명절이다. 다 함께 풍요를 기념하고 추수에 감사하는 날이니만큼 화합과 평화를 상징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플리머스에서 열린 (혹은 그랬던 것으로 알려진) 바로 그 만찬의 장에서 백인들과 나란히 앉아 있었던(혹은 그랬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주민들의 후손들은 입장이 조금 다르다.


1970년, 왐파노악 부족 지도자 왐수타 프랭크 제임스(Wamsutta Frank James)는 추수감사절을 기념하는 연설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주최 측의 사전 검열 탓제임스는 결국 연설 기회를 박탈당했다. 백인의 원주민 학살과 착취에 관한 내용이 원고 곳곳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선조들은 대서양을 건너온 백인들을 환대했지만 결국 곡식과 땅을 모두 빼앗기고 학살당했다고 주장한다. 선조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백인들이 얻어낸 풍요에 감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결국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다양한 부족 출신의 원주민과 활동가 들은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 시위를 벌인다.


추수감사절은 한때 생존을 넘어선 첫 수확의 기쁨이었고, 지금은 가족과 이웃이 모여 따뜻한 식탁을 나누는 날이다. 그러나 같은 날, 누군가는 그 식탁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땅과 언어, 그리고 역사의 상처를 떠올린다. ‘감사’와 ‘애도’는 서로 다른 감정이지만, 그 둘을 함께 기억하는 태도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누리는 풍요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되 오직 그 풍요에만 심취하기보다 그런 풍요 이면에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면 좋을 듯하다.


#추석

#추수감사절

#연휴

#long weekend

#observed holiday

keyword
이전 21화그 나라의 속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