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온도

어서 와, 이런 법원은 처음이지?

by 김현정

‘법원’ 하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법원에 드나드는 사람은 많다. 법을 직접 다루는 사람에서부터 매일 법원에 출근해 법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는 사람, 잘못을 저지르고 법정에 불려가 재판받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면면도 다양하다.


그 다양한 사람 중 가장 상징적인 존재는 아무래도 판사다. 근엄한 옷을 입고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탓에 판사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일단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러나 그보다는 누군가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판사 앞에서 저절로 공손해진다.


한마디로, 판사는 ‘법의 얼굴’이다.


그 얼굴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던 날이 있다.



어서 와, 법원은 처음이지?

오타와 컨스털레이션 드라이브(Constellation Dr).


그곳에는 주정부나 지방 정부가 정한 법규를 위반한 사람들을 재판하는 법원(Provincial Offences Court)이 있다.


몇 해 전 겨울, 그곳에서 교통법규 위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약식 재판을 방청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법원에 들어가 본 날이었다. 법원이라는 단어가 가진 위력은 굉장해서 누구나 주눅 들게 만드는 면이 없지 않지만, 한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법원에 들어가려니 지은 죄도 없이 괜히 온몸이 떨렸다. 법원을 지키고 선 경비원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입꼬리가 떨리도록 미소를 지었다.


약식 재판은 정말이지 간단했다. 법정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이름이 불리면 곧장 앞으로 나가 자신의 사정을 직접 설명했다. 흔히 ticket fighter라고 불리는 교통법규 전문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도 없었다.


FYI. 캐나다에는 ticket fighter, 혹은 ticket doctor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말로 치자면 ‘교통법규 전문 변호사’쯤 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업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법률 사무소도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실제 ‘ticket fighter’나 ‘ticket doctor’라는 상호를 걸고 활동하는 법률 사무소도 많다. 한국인들이 ‘딱지’라고 부르는 벌금 고지서를 캐나다인들도 ‘ticket’이라고 간단하게 표현한다. 약식 재판에 참석해 사정을 잘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정상을 참작해주는 것이 관례다. 벌금이 웬만하면 직접 재판에 출석해 판사한테 사정을 읍소하는 전략을 택하고, 벌금이 지나치게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면 ‘ticket fighter’나 ‘ticket doctor’의 도움을 받는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

판사 앞에 선 사람들의 첫 레퍼토리는 똑같았다. ‘판사한테 잘 보이는 법’ 교본이라도 있는 건지 다들 정말 미안한 얼굴로 일단 잘못을 인정했다. 그다음은 제각각이었다. 사람들은 ‘저한테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답니다. 한번 들어보실래요?’라며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판사의 판결은 대체로 비슷했다. 맨 처음 경찰관이 부과한 벌금을 약간 깎아주는 선에서 대부분의 재판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통상적인 판결과는 다른 ‘전액 납부’ 명령을 받은 아빠와 ‘전액 면제’ 판결을 받은 엄마가 있었다.



어디서 약을 팔아?

‘전액 납부’ 명령을 받은 아빠의 사연은 이랬다.


키가 큰 중년의 남자가 사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밤이었습니다. 교차로 앞에서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는 걸 보기는 했습니다. 멈추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직전에 뒷좌석에 있던 아이에게 사탕을 준 게 기억났습니다. 교차로에서 급정거하면 사탕이 아이의 기도를 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위해서요.”


남자는 딸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했다.


판사의 얼굴은 애매했다. ‘믿어줄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마음을 정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딸이 몇 살이죠?”


남자가 답했다.


“열여섯 살이요.”


판사의 얼굴은 싸늘해졌다. 냉정한 법의 얼굴이었다.


“원래 금액 그대로 내세요.”


남자는 법원에 출두하느라 하루를 통째로 날렸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떠났다. 단 한 푼도 깎지 못할 거면 법원에 출두할 필요도 없었다. 판사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말은 ‘어디서 약을 팔아?’ 아니었을까?


FYI. 판사의 마음을 영어로 표현하면, “I don’t buy it.” 정도 된다. 영어 동사 ‘buy’의 가장 흔한 뜻은 ‘사다’, ‘구매하다’지만 그 외에 ‘믿다’라는 의미로도 자주 쓰인다. 드라마나 영화의 등장인물들도 상대방의 말을 믿지 않을 때 ‘I don’t buy it.’이라는 문장을 자주 사용한다.



그냥 가세요

‘전액 면제’ 판결을 받은 엄마의 사연은 이랬다.


30대쯤 돼 보이는 여성이 판사 앞에 서서 먼저 잘못을 인정했다. 겉모습에 딱히 신경 쓸 여력은 없는 듯 머리가 부스스했다.


“얼마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저는 이래저래 좀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거든요. 그러다 이번에는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셋인데요. 둘은 이웃한테 맡겨 두고 병원에 있는 아이한테 달려가는 길이었어요.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마음이 급했어요. 죄송합니다.”


여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여자는 온몸으로 우는 것처럼 보였다.


골똘히 생각하던 판사가 입을 열었다.


“벌금 안 내도 됩니다. 전액 면제해 드립니다.”

판사의 얼굴이 한결 온화해 보였다.



AI vs. 사람

‘법이 과연 공정한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몇 해 전, 버스 요금 800원을 횡령한 기사는 해고당해 마땅하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수십, 수백억을 횡령한 기업인들은 집행유예로 풀어주면서 800원을 빼돌린 버스 기사한테는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지 않는 법이 가혹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AI에 판결을 맡기는 게 낫지!’라는 한탄이 곳곳에서 들리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법은 공정해야 한다’라는 원칙은 무시된 채 힘과 돈이 곧 법이 되는 세상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AI에 판결을 맡기면 그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원칙대로 일관성 있게 규칙을 적용할 테니 차라리 그게 낫겠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법은 공정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법에는 온기가 필요하다.


만약 AI 판사가 오타와의 그 법정에 앉아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벌금 좀 덜 내겠다고 딸 핑계를 대는 아빠도, 병원에 입원한 아들한테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가속 페달을 밟은 엄마도 그저 똑같은 죄를 범한 ‘유죄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AI보다는 진짜 사람이 법복을 입고 판사석에 앉아 법정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미 많이 가진 자들이 (무엇이 됐건) 좀 더 많은 걸 쟁취하기 위해 읊어대는 사정보다는 정말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내보이는 진심을 좀 더 믿어주는 그런 ‘법의 얼굴’을 보고 싶다.

* FYI는 '네게 정보를 주기 위해', '참고로' 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for your information'을 줄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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