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탈을 쓴 무국적 언어
“Your English is perfect!”
입국 심사대 앞에 서면 괜히 작아진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 때문에 입국을 거부당하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말도 못 하게 콩닥거린다. 여행할 때도 그렇지만 몇 년쯤 살 계획을 세우고 이민 심사관 앞에 서면 지은 죄가 없어도 잔뜩 주눅이 든다.
몇 해 전, 2년 동안 살아볼 작정으로 캐나다로 떠났다. 떠나기 전, 필요한 모든 서류를 보기 좋게 클리어 파일에 챙겨 넣고 각 페이지에 어떤 서류가 담겨 있는지 라벨도 붙여 두었다. 사실 나는 딱히 꼼꼼한 성격은 아니다. 그저 일일이 서류를 찾아서 확인해야 하는 심사관의 수고를 최대한 덜어줘 좋은 인상을 남기겠다는 전략이었을 뿐이다. 내가 내민 서류철을 받아든 심사관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옆자리 동료에게 자랑스레 보여주기까지 했다.
심사관 앞에 선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심정으로 ‘5W2H’에 해당하는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출국을 앞두고 몇 번이나 연습한 내용이었다. 5W2H란 육하원칙(5W1H)에 해당하는 ‘who(누가)’, ‘what(무엇을)’, ‘when(언제)’, ‘where(어디서)’, ‘why(왜)’, ‘how(어떻게)’에 1H(how much, 얼마나)를 더한 것이다. 일정 금액 이상의 현금을 직접 갖고 갈 경우 제대로 신고해야 불이익을 면할 수 있다. 차량을 구매할 때 사용할 나름 거액의 현금을 들고 갔기 때문에 육하원칙에 그치지 않고 how much에 관한 설명도 필요했다.
심사관은 활짝 웃으며 “Your English is perfect!”를 외쳤다.
나의 완벽한 영어는 거기까지였다. 물론 <당신의 영어는 무죄다>에서 설명했듯이 애초에 완벽한 영어란 건 없다. “Your English is perfect!”라는 말을 듣고 ‘오호라, 내 영어가 완벽할 정도로 끝내준다는 거지?!’라고 흥분해서는 안 된다. 그 뒤에는 “for a non-native speaker(외국인 치고는)”라는 말이 감춰져 있으니까. 한마디로, '외국인치고는 그래도 영어 좀 한다'라는 인사말일 뿐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도 같은 한국 사람끼리 “넌 한국어가 정말 완벽해”라는 말을 칭찬으로 주고받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의 한국어 실력에 놀라는 경우는 상대가 한국어를 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 즉 어디까지나 상대가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경우에 한해서다.
나의 영어가 가장 처참하게 무너지는 곳은 주로 마트였다. 글로 영어를 배운 토종 한국인답게
책에 없는 영어가 난무하는 마트에 들어서면 늘 어지럽게 머리가 윙윙 돌아갔다.
물티슈가 필요한 날이었다. 물티슈를 찾아 여러 통로를 헤매다 결국 가까이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Excuse me, where can I find WET TISSUES?”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도달한 결론이었다. ‘wet tissues’를 찾는다는 말을 내뱉으며 나름 뿌듯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이는 ‘물티슈’라는 단어는 한국어 ‘물’에 영어 단어 ‘tissue’를 소리 나는 대로 덧붙여 만든 것이다. 반대로 한국에서 쓰는 물티슈를 영어로 옮긴다면 ‘water tissue’가 된다. 그러나, 마트 점원 앞에서 나는 말 그대로 물을 뜻하는 ‘water’를 붙여 ‘water tissues’라고는 하는 대신 ‘물에 젖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형용사 ‘wet’을 이용해 ‘wet tissues’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점원은 ‘으잉?’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뭘 찾는다고요?”
“그거요. 티슈는 티슈인데 물에 젖어 있는 거요. 바닥에 더러운 거 묻었을 때도 쓰고, 아기 기저귀 갈 때도 쓰는 뭐 그런 거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점원은 알아들었다.
“네. 그건 wet tissues 아니고 wet wipes입니다. 혹은 baby wipes라고도 해요.”
그렇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두툼하고 촉촉한 물티슈의 진짜 이름은 ‘wet tissue’가 아닌 ‘wet wipe’였다. 물론, 물티슈를 ‘wet tissue’라고 부르는 원어민도 있지만 ‘tissue’라는 단어 자체가 얇은 종이 화장지를 뜻하는 것인 만큼 ‘wet wipe’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널리 사용된다.
캐나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또 하나의 무국적 표현. 바로 ‘원 플러스 원’이다. ‘원 플러스 원’의 엄청난 힘을 한국 사람들은 찰떡같이 이해하지만, 캐나다 사람들 앞에서 ‘원 플러스 원’이라고 말하면 ‘1 더하기 1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줄 알고 ‘Two’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드립니다’를 뜻하는 영어 표현은 ‘원 플러스 원’이 아니라 ‘Buy One Get One Free’다. 줄여서 BOGO, 혹은 BOGO Deal이라고도 한다. 응용 버전으로 ‘두 플러스 원’은 ‘Buy Two Get One Free’가 된다.
어떤가? ‘영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어 더 골치가 아픈가?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언어의 세계는 뒤죽박죽이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언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더해지는 것뿐이다. 영어는 절대적으로 옳고, 콩글리시는 무조건 틀렸다는 법칙 같은 것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영어라고 믿는 상당수의 단어가 다른 나라 출신이다. pizza와 espresso는 이탈리아, taco와 guerrilla는 스페인, omellett과 souvenir는 프랑스에서 온 단어다.
어디 그뿐인가. 김치나 불고기 같은 진짜 한국어는 물론 ‘먹방’ 같은 신조어까지 영어 사전에 등재돼 있다. 심지어, 한국인들이 영어 단어를 따다가 마음대로 바꿔서 쓰는 콩글리시가 역수출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visual’을 들 수 있다. 영어 단어 ‘visual’은 원래 ‘시각의’라는 뜻의 형용사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아이돌 그룹에서 외모를 담당하는 멤버를 ‘비주얼’로 표현했다. 세계 무대에서 K-POP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해외 K-POP 팬들 역시 아이돌 그룹에서 멋진 외모를 뽐내는 멤버를 ‘visual’로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가. 이쯤 되면 수긍되지 않는가? 완벽한 영어는 없다. (입국 심사대 앞에서나 기분 좋은 말일 뿐이다.) 정말이다. 언어는 곧 문화다.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우리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한 문화도, 언어도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콩글리시든 무국적 언어든 감추지 말고 자신 있게 사용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