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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키드 May 05. 2024

쓸모를 고민하지 않는 시간

새로운 일상이 마음에 드는 요즘

은영님에게.


 퇴사하던 날 해방촌에서 두 팔을 벌리며 만세를 외쳤을 은영님의 모습을 상상하니 미소가 지어졌어요. 제가 만약 그 옆에 있었다면 저도 덩달아서 만세를 외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서로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을 순간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흐뭇한 마음이 들어요. 머쓱하다고 했지만 저는 꼭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너무 잘했어요!!

 삶의 작은 순간들을 기념하려 노력한다는 은영님의 편지를 읽으며 조금 뜨끔했어요. 부모님은 제게 늘 소소한 일도 의미 있게 챙겨주셨는데 정작 저는 그걸 까먹고 있었더라고요. 덕분에 휴직의 시작을 기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함께 해주겠다는 말에 실은 더 뛸 듯이 기뻤어요. 즐거운 고민을 하게 해 줘서 고마워요! 다음 만남까지 고민해 보고 조만간 함께 기념해 보기를 기대해 봅니다.


 최근의 저는 시간의 쓸모를 다르게 고민하며 지내고 있어요. 그동안은 잔뜩 쌓인 할 일 목록을 끊임없이 치우며 지냈던 것 같아요. 목록을 아무리 지워도 지우는 속도보다 새롭게 생겨나는 속도가 더 빨라서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계속 붓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특히 회사일, 집안일, 아이들과 관련된 일만 대부분 쓸모 있는 일로 여겨왔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해야 하는 일'은 하루에 하나씩만 하고, 나머지는 '재미있는 일'을 하며 보내려 해요. 내가 보내는 모든 시간의 쓸모를 좀 덜 고민하며 품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이렇게 쓰면서 생각해 보니 애초에 쓸모없는 시간이라는 건 없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무엇에 그리 쫓기듯 지내왔을까 싶기도 해요. 이번 주에는 아이들과 손잡고 집을 나서는 시간, 꼬깃꼬깃해진 셔츠들을 다림질하는 시간, 우리 집 베란다 캠핑존에서 멍 때리는 시간 하나하나가 너무 좋았어요. "너무 좋다~"고 느끼고 말할 수 있어서 더 좋아요.


귀여운 아침 등굣길 & 혼자 즐기는 베란다 캠크닉 (너무 좋아요!!!)




 은영님은 짬이 날 때 즐겨보는 드라마나 영화가 있나요? 최근에 저는 2016년에 나왔던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한국 드라마를 다시 보고 있어요. 육칠십 대 어른들의 삶을 그린 드라마인데, 평소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어른들의 행동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분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그리고 사랑의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잘 모르는 삶이라고 해서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겠구나. 사람들은 저마다의 깊은 서사를 가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이 드라마를 보며 들더라고요. 그리고 드라마 속에 나오는 부모-자식 간 관계를 보면서 문득 최고의 사랑은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를 위해 내 삶의 일부를 할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이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가는 이 시간이 너무나 귀하게 여겨졌어요.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주고 있으니까요.

 늘 저에게 많은 사랑을 쏟아준 가족들, 함께 휴직을 기념해 주겠다는 은영님에게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고요. 누군가를 응원해주고 싶을 때면 어떤 게 가장 큰 응원이 될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 알겠어요. 앞으로 저는 시간을 내어줘야겠어요!


젊은 시절에도, 나이가 들어도 삶은 늘 계속되고 있는 것이더라고요.


 드라마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다'라는 대사가 나와요. 주인공들이 대부분 치열했던 삶을 지나 점점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다루거든요. 영원할 것 같던 순간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들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죽음으로 인한 이별... 과 같은) 지금 주어진 순간들을 소중히 누리는 어른들의 모습에 저도 마음이 뭉클해지더라고요. 젊은 날에는 완성형의 나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이 다 삶 그 자체더라고요? 그 상황 속에 빠져있으면 왜 그리 힘들고 아득하게만 느껴지는지... 아직 저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인가 봅니다.


 어린이날과 곧 다가 올 어버이날을 챙기러 겸사겸사 이번 주말에는 친정에 내려왔어요. 가족들과 해안가로 나들이를 갔다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보니 노트북을 펼치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강화도로 워케이션을 떠난다던 은영님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왔을지 무척 궁금해요. 매일 같은 사무실로 출근하며 일하기만 했던 저에게 워케이션은 로망에 가까운 일인지라 어떤 일상을 보냈을지 상상이 잘 안 되더라고요. 다음 주 전시 때 잠시 응원 겸 구경하러 들를게요. 곧 만나요!



- 24년 5월 5일 일요일 밤


오랜만에 앉은 엄마의 식탁에서, 여덟 번째 편지를 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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