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이었던 2003년, 봄학기가 시작되었던 3월의 맑은 날, 다음학기 등록금 대출을 알아보러 여기저기 뛰어나뎠고 결론은 대출 불가였다. 서러움이 밀려왔다. 학생회관 앞 통일광장 길바닦에 철퍼덕 주저 앉아 한참을 대성통곡했다. 나의 대학생활은 끝이 났다.
지금이야 보증인이나 담보 없이 학자금 대출이 가능하지만 학교 안에 있는 우리은행 대출 상담사는 나에게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부모님은 신용불량자였고, 친오빠는 군대에 가 있었다. 친척 중 어떤 누구도 내 학비마련을 도와주지 않았다.
왜 다니는지도 모르는 대학교였지만 그저 남들에게 꽤 괜찮은 대학교에 재학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내 나이 또래 아이들이 대부분 대학생인 것처럼 나도 그냥 대학생으로 끼어있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컸다. 혼자서 생활비, 학비, 등록금 모두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난 항복했다.
18살, 고등학교 2학년 :: 성악에서 실용음악으로 진로 수정
19살, 고등학교 3학년 :: 예체능계열에서 인문계로 진로 수정
20살, 대학교 1학년 :: 물리치료과 입학 후 반학기만에 자퇴
21살, 대학교 1학년 :: 사립대 일본어학과 입학 후 2학년 자퇴
23살, 대학교 3학년 :: 방송통신대 3학년 편입학
25살, 방송통신대 자퇴
27살, 학점은행제 학사 졸업
33살, 대학원 석사 졸업
나의 이력서가 입학과 자퇴로 채워졌던 15년의 시간동안 아빠의 일자리는 내가 학적을 바꾼 것보다 더 많이 바뀌었고 우리가족은 내가 20살 때보다 더 가난해졌다.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22살의 김프리는 통일광장에서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를 생각해봤다. 대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없는 내 현실이 짜증났고 패배자처럼 느껴졌다.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어렵게 감추며 살았는데 이젠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집 부모처럼, 자식 학비 하나 해결 못하는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대학교 졸업장 하나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막막했고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대학을 온 똑똑한 학생이 입학 후 4년동안 수업만 잘 들으면 얻을 수 있다는 그 흔하디 흔한 "대학교 졸업장" 하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억울했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고, 배우고 싶은 것도 없었던 20대의 나는 마음이 급했다. 대학에 가면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거라 믿었고, 찾지 못하면 남들 가는 길로 그저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평타는 치고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들이 가는 길조차도 쉽게 따라갈 수 없는 형편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내 진로는 점점 더 꼬여갔고 내가 그리던 인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고등학교부터 꼬이기 시작한 내 진로는 직장과 직업 선택의 폭을 확 줄였고, 나는 늘 직장과 직업의 선택에서 약자였다. 원하는 직무를 맡아본 적이 없고 프로젝트를 맡아본 적도 없으며 팀에 섞여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임원비서라는 듣기 좋은 단어로 포장했지만 부서내 잡무와 심부름이 내 담당업무였고, 3번의 이직에도 불구하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비서라는 직무를 어쩔 수 없이 붙잡고 있어야 했다.
4년제 대학교 졸업장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매일매일 했다. 대기업 공채에 입사지원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면 어느 회사에 입사해서 어떤 직무를 경험했을까 수천번 상상했다. 적어도 사무행정보조로 첫 직장을 시작하진 않았을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내 인생은 분명 달라졌을테고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더 행복해졌을까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적어도 처량하고 초라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매달 받는 월급이 끊기고, 회사에서 짤려 월세를 못낼까봐 전전긍긍하진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대학교 졸업장과 학사모를 쓴 대학교 졸업식 사진이 없다. 그렇게 돌고 돌아 40살이 된 지금의 나는 너무도 평범한 엄마로 산다. 맺혀있던 학벌 컴플렉스는 결혼 후 대학원 졸업으로 풀어냈다. 졸업 후 어디다 써먹을 곳이 없는 전공이었지만 어린 아이를 이고 지고 매고 엎어가며 공부했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식 때는 석사모를 쓴 사진을 남편과 함께 찍었다.
8할의 결핍이 나를 키웠다고 인정한다. 그 덕에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흔이 되어 지난 20년을 돌아보니 살면서 큰 의미없는 학사모에 너무 큰 의미를 두며 살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고달팠던 20대의 나에게 좀 더 친절하게 대할 걸 후회도 된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견뎌내며 온 몸으로 받아내느라 고생한 나 자신을 지금이라도 아끼고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