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대용금을 써서 주식을 샀는데 주식이 계속 떨어지는 거야. 그래서 오를 줄 알고 돈을 빌려 샀는데 계속 떨어지고 어느 순간 수습이 안되더라. 그때 IMF가 터졌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되어버렸어"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무원을 그만두셨다. 1998년 IMF의 고통이 시작되던 그때, 아빠 나이로 40대 중후반이었고 정년퇴직 아닌 희망퇴직이었다. 사유는 "채무상환"이었다.
약 20년간의 공무원 생활로 쌓인 퇴직금의 대부분은 증권사에서 빌려다 쓴 고금리 대출 상환에 쓰였고, 그중 일부는 가족들 모르게 다시 주식을 매입하는 데에 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우리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입찰자가 한 명도 없어 작은 아빠들과의 협의 끝에 셋째 작은 아빠가 낙찰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살림살이를 옮겨 살던 집 옥상에 지어진 철제 조립식 판넬 가건물로 이사를 했고 월세를 내지 않는 2층 세입자 신세가 되었다. 내 나이 21살이었다.
집이지만 집이 아닌 공간.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단독주택은 아빠가 공무원이었던 시절에 대출을 받아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지었던 집이었다. 집 짓는 비용은 장남인 아빠의 월급으로 십수 년 분할 상환했고 조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아빠에게 상속된 집이었다. 그렇게 우린 우리 집이 아닌 우리 집에 살게 되었다.
지은 지 10년이 넘은 그 집은 여러 명의 세입자들을 거쳐가면서 장판과 도배지와 싱크대, 욕실 모두가 낡아있었다. 1층에서 2층으로 이사 온 엄마는 사람들이 보지도 않는데 창문 너머로 우리 사는 모양을 들킬까 봐 깜깜한 암막 커튼으로 모든 창문을 다 막았고, 오래된 조립식 판넬 가건물은 여름엔 더웠고 겨울엔 추웠다. 대부분의 전선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언제 감전돼도 이상하지 않았고 장판은 다 뜯어져 하얀 시멘트 바닥이 곳곳에 노출되었다. 술에 취한 아빠는 2층으로 올라가는 난간 없는 좁은 계단에서 떨어져 여러 번 응급실에 실려갔고, 화장실엔 변기가 없어 1층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21살이 된 나는 그 집과 그 동네가 싫어 도망치듯 인천으로 대학 입학을 했고 결혼 전까지 쭉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했다.
그 후 꽤 오랫동안 나를 제외한 3명의 가족은 (엄마, 아빠, 오빠) 그 집에서 살았다. 외로운 타향살이에 지쳐 부모님과 오빠를 만나러 갈 때마다 춥고 초라한 그 집이 미친 듯이 싫었다. 잘 방이 없어 부모님과 함께 안방에서 자야 했고, 겨울엔 거실, 주방, 화장실에서 찬 입김이 나왔다. 집 안에서도 밖에 있는 것처럼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어야 했고, 바닥이 냉골이라 맨발로 집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겨울엔 물이 얼어 샤워를 하려면 동네 목욕탕에 가야 했다. 행여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고 하면 우리 집 사는 모양을 들킬까 봐 어떻게든 거절했고, 심지어 결혼을 하기로 약속한 당시의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이 그 집에 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 땐 정말 너무 쪽팔리고 창피해서 숨고 싶었다.
어린 나는 부모님만 보면 화를 내고 시비를 걸었다. 도대체 뭐하고 사는데 이사를 못 가냐며, 자식들 모두대학을 중퇴하고 취업해 돈을 버는데 도대체 뭐하고 사시냐고 만날 때마다 폭탄 같은 악담을 퍼부었다. 오빠는 수입고기 육가공업체의 냉동창고에서 일했고 월급여 50만 원인 태권도장 사범 생활을 했다. 나는 월 100의 사무행정 계약직으로 수년째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 들어먹고도 주식투자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아빠는 엄마를 닥달해서 보험을 깨고 적금을 깨서 주식을 샀다. 아빠가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귀신 나올 것 같은 그 집에서의 생활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감추고 싶었을까?
남보기에도 삶의 초라함이 묻어나는 그 허름하고 낡은 집이 부끄러웠을까?
겉보기엔 화목해 보이지만 매일 서로에 대한 질타와 비난을 퍼붓는 구질구질한 가족이 부끄러웠을까?
주식 중독에 걸린, 허황된 꿈만 꾸는 아빠와 생활력 없는 엄마가 부끄러웠을까?
무능력한 부모 때문에 계약직으로 일하며 서울에서 겨우겨우 월세 생활을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을까?
부잣집이 아니어도 되니 남들 사는 만큼만 살았으면 했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 입사를 꿈꾸지도 않았다. 그저 내 또래 아이들처럼 같은 출발 라인에서 비교적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얻고 싶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출발점은 고졸이었고 비정규직이었다. 출발선이 다르니 인생의 방향도 다르게 흘러갔다.
그땐 몰랐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인생의 출발선이 조금 뒤처지더라도 결승점엔 누가 먼저 들어오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의 목표가 명확하다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괜찮다는 것을.
아빠가 나고 자랐던 집, 아빠가 이사한 번 가지 않고 근 60년간 살았던 그 집에서 부모님을 빼내는 것이 나의 유일한 꿈이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7년 넘게 넣고 있던 보험을 해약해서 영구임대아파트 보증금 1천만 원을 만들었고 부모님을 탈출시켰다. 그 사이 우리 부모님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고 임대아파트에 당첨되어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다.
부모님의 형편은 여전히 아빠가 퇴직했던 1998년과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의 집을 감추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나의 부모님이 어떤 집에 사는지 관심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정말로 감추고 싶었던 것은 철제 조립식 판넬의 그 집이 아니라 삶이 너무 고단하고 불행했던 우리 가족과 나의 현실이었던 것 같다.
나는 부모님께 더 이상 이사를 가라, 돈을 더 벌어라, 더 치열하게 생업에 뛰어들어라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어느 시점부터 비난과 원망도 멈췄다. 자신의 인생을 일부러 망치는 사람은 없고 우리 부모님 역시 바로 어제까지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믿는다.
나무가 나무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듯, 나의 아이들이 나를 엄마라는 자체만으로 사랑하듯, 나의 부모님 역시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나이 40이 되서야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