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회사는 나에게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용돈과 학비 줘가며 애지중지 키운 고시준비생 남자친구에게 처절하게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첫 아이 출산 후 60일만에 복귀했지만 5개월 후 나는 회사에서 쫓겨났다.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고 큰 아이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느닷없이 사회에서 쓸모가 없어진 나는 당황했고 혼란스러웠했다.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후 오전 9시, 목적지도 없이 어디론가 향해 무엇인가를 하다 오후 6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갈 곳도, 할 일도 잃어버린 나는 미래가 막막했다.
31살의 기혼녀, 돌도 되지 않는 어린아이의 엄마라는 상황은 나에게 꽤 절망적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세상으로 나가 나와 일과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해 주고 조직이 처해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다. 아이를 키워야 하는 문제는 내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어떤 누군가에게 내가 뭐라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했다. 불안했고 조급했다. 조급한 마음에 1시간짜리 강의 PPT도 준비하지 않은 채 경력만 믿고 비서 교육을 하겠다며 1인 교육기업가 사업을 시작했다. 차포 다 떼고 나라는 사람을 시장에 내어놓고 보니 그제서야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내 경력은 회사라는 간판 덕분에 쓰임이 있어 보였고, 나는 그것을 내 능력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교육 시장에서 충분히 먹힐 거라 생각했던 나의 업무 경력과 노하우는 타인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돈을 받고 판매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만만하게 봤던 창업의 세계는 총과 칼이 보이지 않는 생존 전쟁터였다. 나는 더 초초해졌고 더 조급해졌다. 여러 번 방향을 바꿔 수익을 낼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벽에 가로막혔다. 그 시점에서 내가 꼭 해야 되고 나 밖에 할 수 없는 일을 소홀히 한 결과였다.
가면 속에 감춰진 얼굴을 보게 되다
둘째가 태어나니 낮은 자존감과 일중독,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내 문제는 점점 더 커져갔지만 이번에도 내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또 다시 세상에 나갈 궁리를 했고 결국 재취업을 했다. 쌓인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딸에게 분리불안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의 위기였고, 아이들의 위기였고, 내 가정의 위기였다.
아이의 심리적 문제를 인정하니 그제서야 내 상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직장생활은 가족 모두를 불행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딸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해결의 열쇠는 엄마인 내가 쥐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놓아야 될 것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퇴사는 월급만 포기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퇴사를 가장한 육아휴직 1년 차, 딸아이는 유치원을 적응하는 데에 꼬박 1년이 걸렸다. 소변을 참았고 울음이 시작되면 최소 1시간이었다. 담임선생님과 눈을 맞추고 손을 잡는 것,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노는 것을 힘들어했다. 미안한 일이 있을 때 사과하지 않고 도망을 쳤다. 엄마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좋다, 싫다의 표현을 일절 하지 않았다.
아이와의 건강한 애착형성을 위해 참 열심히 노력한 끝에 아이는 점점 심리적 안정을 찾아갔지만 그 다음 해도 풀어야 할 매듭이 가득했다. 유치원 생활에 적응했지만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가족이라도 성인 남성을 경계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누가 말을 걸어도 무시했다. 점심시간에 나온 반찬 중 먹기 싫은 반찬은 하원할 때까지 입에 물고 있다 엄마인 나를 만나면 그제서야 음식을 뱉었다. 여전히 아이의 마음은 얼어있었다.
엄마가 된 이후 나의 문제는 사회적 쓰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키우는 엄마라는 역할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였고, 회사에서 억울하게 잘려 상처받은 내 마음을 잘 다독이며 위로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연애할 때도 단 한 번의 다툼이 없었던 남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되돌려 놓는 것도 내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젊은 시절을 누군가 때문에 특히 아이 때문에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육아는 내 삶을 포기하는 것, 원치 않는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인생도 소중하지만 내 인생도 소중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깨달았다. 갓난 아이는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린아이는 그저 엄마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사랑으로 돌봐주기만을 원한다는 것을. 때를 놓쳐버리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나는 갓 태어난 아이의 생존과 잠시 뒤로 미뤄 놓아도 괜찮은 나의 자아실현을 놓고 저울질했다. 육아의 가치와 돌봄의 영역을 하찮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이가 나쁜 부모님 때문이기도 했고, 낮은 자존감 때문이기도 했다. 핑계는 수십, 수백 가지를 댈 수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마라는 역할에 무지했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듯이 엄마의 역할도 어느 시점에는 끝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서야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싫든 좋든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엄마라는 역할과 행복하게 동행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의 아이들은 엄마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가 대신할 수는 있지만 엄마를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없는 유일한 무대.
모든 문제는 타인의 힘을 잠시 빌릴 수는 있지만 결국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스스로 설 수 없는 아이들의 돌봄은 엄마가 두 팔 걷어 붙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부모만큼 특히 엄마만큼 이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돈으로 해결하기 힘든 영역이고 온 마음을 다해도 칭찬받기 어려운 일이지만 엄마니까 해야한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두 아이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한다. 잘 먹이고, 깨끗한 옷을 입히고 아이들과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산다. 아이들의 환한 웃음이 나의 사회적 성취를 보여준다.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는 내 아이들이 내 작품이고, 활동 보고서이다.
아이들이 커가는 길목마다 엄마인 내가 서 있다. 나의 매일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날들을 겹겹히 쌓아두는 일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행복한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