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우주 속에서
스물둘, 교환학생에서 쓸 생활비를 벌기 위해 휴학을 하고 고향에서 풀타임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했다. 엑셀 시트에 적힌 주소와 장소가 일치하는 폴더를 찾고 그 폴더 안의 사진을 살펴보며 기지국 안테나가 제대로 설치 됐는지 간단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하루 종일 숨은 그림찾기 하듯 사진 속 안테나를 찾고 확대하고 크롭하고 복사해 붙여 넣고….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었다. 전국 곳곳에 이렇게 많은 동과 읍과 면과 리가 있는 줄 몰랐다. 주소를 짚어가며 찾은 동명의 폴더를 열면 그곳의 실제 모습이 펼쳐졌다. 이때 깨달았다. 나는 이런 것에 흥미가 있구나.
생각해 보면 스무 살 텔레마케팅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국 곳곳의 주소 옆에 적힌 가입자의 연락처로 전화해 통신사의 새로운 프로모션을 설치하도록 영업하는 일이었다. 한국엔 이렇게 많은 동네가 있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역을 보고 전화를 걸면 수화기 너머로 그 지역의 말투가 생생히 들려왔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올림픽 대로를 탈 때는 한쪽에 맞대고 있는 집들의 창문을 훑어보며 이들은 어떤 삶을, 어떤 하루를 살고 있을까 떠올린다. 해외에 여행 갔을 때도 골목에서 내 온통 관심은 온갖 집들과 창문과 그 안에 살고 있을 사람들의 인생과 오늘 하루다. 아침엔 언제 일어나는지, 아침은 무엇을 먹는지, 퇴근은 몇 시인지, 요즘 고민은 무엇인지, 퇴근하고선 무얼 하는지.
요즘 일도 출근을 하면 하룻밤 동안의 주문 내역이 뜬다. 주문 내역엔 전국 곳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주소도 함께 뜬다. 가끔은 고향 주소가 뜨면 신기하고, 여행 갔던 동해의 작은 읍내가 뜨면 반갑다. 인제 신남이 붙어 있는 귀여운 표지판이 떠오르고, 발음이 귀여워 강아지와 함께 살게 된다면 이름으로 붙이겠다던 둔당이 떠오르고.
눈 오는 날 헤매던 우리에게 버스 시간표를 알려 주던 둔내의 그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가곡면의 다정한 사장님과 호두는 요즘 저녁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코맹맹이 소리에 충청도 말씨를 써 꼭 장범준 같았던 충청도의 그분은 건강하신지, 보령 대천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며 밤마다 아지트 삼아 친구들과 모이던 그 젊은 사장님은 행복하신지. 인스타를 켜면 비슷한 라이프스타일, 비슷한 옷차림으로 사는 인플루언서들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집 안에서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