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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Sep 08. 2018

싱가포르 아이처럼

유목 육아 in 싱가포르 - 5

시카고의 바람 부는 날 만큼이나 이 곳 싱가포르는 비 오는 날이 많다. 벌써 싱가포르에 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그중에서 새벽 천둥 번개 소리에 잠이 깨지 않은 날이 몇 번 없던 것 같다. 아, 날씨 때문에 기분이 안 좋다는 소리는 아니다. 난 겁은 많지만 의외로 천둥 번개 소리를 좋아한다. 특히 그 날 내가 굳이 밖에 나가야 될 일이 없을 때면 더더욱. 그렇게 비가 퍼붓는 날일수록 날 감싸고 있는 집안의 온기가 더 안락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건 내가 아이가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천둥 번개에 폭우가 쏟아지는 아침, 호텔 방에만 있으면 곧 지루해할 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놀러 갈까 고민하다가 실내인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이렇게 후덥지근 스콜성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온도, 습도 적절하게 조절되는 산뜻한 미술관만큼 좋은 곳이 없다. 호텔을 나서려는데 아이는 어제 길을 가다 본 2층 시내버스가 타고 싶다고 했다. 어차피 꺾이지 않을 고집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호텔 무료 셔틀을 굳이 사양하고 쏟아지는 장대비에 우산을 쓰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이는 무료 탑승이고 어른은 싱달러 1.50. 잔돈은 거슬러 주지 않기 때문에 난 가방을 뒤져 1불짜리 동전 두 개를 찾는 동안 아이는 혼자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버스 안은 텅 비어있었고 싱가포르답게 에어컨 쌩쌩, 매우 쾌적했다. 난생처음 2층 버스를 탄 아이는 신이 나는지 한참 동안을 창 밖 구경을 하더니, 이내 내 무릎에 올라와 쿨쿨 깊은 낮잠에 빠졌다. 창 밖엔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음 정거장이 바로 미술관이지만 도저히 이 잠든 아이를 데리고 내릴 수가 없어서 우린 그대로 정류장을 지나쳤다.  



싱가포르 맨 남단에서 시작한 이 960번 시내버스 투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난 구글맵을 계속 들여다보며 언제 내려서 다시 돌아가야 되나 고민을 했다. 중간에 버스 직원이 와서 더 멀리 가기 위해서는 싱달러 1불을 더 내야 된다고 해서 동전 하나를 더 받아갔다. 관광지를 지나 주택가를 지나 숲 속을 지나 북쪽으로 향해 가던 버스는 비로소 싱가포르 - 말레이시아 국경 즈음에 가서야 멈췄다. 거기가 바로 시내버스 종점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탑승객이 내려야 되는 종점에 가서도 여전히 깊은 잠에 빠진 아이를 들쳐 엎고 난 반대편 정류장으로 가서 다시 새로운 960번 버스를 타고 자리를 잡았다. 버스가 달리고 한참이 지나 다시 익숙한 동네에 들어왔을 때는 내가 처음 이 버스를 탄지 3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 있었다.



시내에 거의 들어왔을 때 비도 멈춰서 해가 나기 시작했고, 아이도 두 시간 넘은 긴 낮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를 계속 안고 있었더니 손발이 저려서 이제 그만 버스에서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순간 Singapore National Library라는 간판이 보였다. 적어도 국립 도서관이니 어린이 시설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무작정 벨을 누르고 내렸다.


역시 4년 차 엄마의 직감이 맞았다. 이 곳엔 싱가포르에서 가장 좋다고 손꼽히는 어린이 도서관이 있었다. 마침 어린이 도서 축제 기간이라 도서관 곳곳에서 아이들과 부모가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고, 싱가포르의 유명한 동화 작가들은 모두 모여있었다. 싱가포르의 인기 있는 동화책들을 보니 참 재밌었다. 미국에서도 흑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 가면 그 동네 극장엔 항상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들을 주로 상영하는데, 싱가포르에서도 동화책 언어는 영어로 되어있지만 그 안의 주인공과 가족들은 모두 검은 머리 동양인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버스에서 내려 들어간 도서관에서 우린 동화 작가의 강연도 듣고, 선물도 받고 꽤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사실 이 날의 수확은 따로 있었다. 어린이 책 축제 기간인 만큼 도서관 앞에서는 여러 어린이 프로그램 홍보 부스가 차려졌는데 Abrakadoodle이라는 어린이 미술 프로그램도 그중의 하나였다. 마침 선생님과 일대일로 미술 수업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딱히 오후에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수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워낙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미국에 있을 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 미술 수업을 다녔는데 사실 미국의 3세 아이 미술 교육은 색칠 공부에 가까웠다. 여기에서 정식 캔버스에 앞치마를 두르고 유화 스타일(사실은 아크릴 물감)의 작품 하나를 선생님과 그려내니 아이는 신이 났다. 잠깐이지만 싱가포르에 와서 처음으로 30분의 자유시간을 얻은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센터 위치를 확인해보니 마침 우리가 다음 주부터 머무를 오챠드 로드에 있는 곳이라 우린 고민 없이 남은 싱가포르 생활 2주 치의 미술 학원을 등록했다. 아이에겐 아시아로의 역유학이다.



싱가포르에서의 첫 주가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오늘 아침도 여전히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내리고 있다. 우린 곧 첫 번째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센토사에 있는 두 번째 호텔로 숙소를 옮길 예정이다. 아이와 24시간 놀고, 놀고, 또 놀아줘야 되는 이 한 달이 사실 체력적, 정신적으로 쉽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이 엉뚱하면서도 예측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싱가포르의 이 특별한 9월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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